평생 기억될 황당한 실수
평소 내겐 확고한 신념이 있다.
사람은 늙어 갈수록 정신적인 자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간 누구나 혼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각자도생을 강조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에는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이번 미국 여행도 자식들을 귀찮게 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준비했다.
그러나 지나친 나의 자립심 때문에 평생 잊지 못할 황당한 실수를 했다.
한 달간의 미국 여행을 잘 끝내고, 귀국할 때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른 새벽 출발을 위해, 전날 미리 짐을 다 싸놓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마지막으로 비행기 체크인을 하려고 휴대폰을 열었지만 체크인을 할 수 있는 화면이 뜨지 않았다. 출발 24시간 전에 열어주는 창인데 체크인 화면이 열리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동생은 체크인을 원만하게 했는데, 나는 체크인이 되지 않아 이리저리 휴대폰을 터치했다. 잠깐 오류라는 단어가 화면에 떴다가 지워졌다. 뭔가 문제가 생겼나 보다 하고 휴대폰을 그대로 덮어두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라 동생과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하였다. 조용히 떠날 채비를 다 마치자,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조카 내외가 2층에서 내려왔다.
조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아직 컴컴한 거리로 나왔다. 상쾌한 새벽 공기가 이별을 아쉬워하는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 것 같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미국땅에 두고 헤어져야 하는 동생 얼굴이 서운함으로 가득하다.
"난 자식들을 일 년에 스무 번도 못 보는데, 너는 한 달이나 보았으니 네가 더 많이 아들을 보는 거야.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내년에 또 올 거잖아."
안타까운 마음에 어설프게 위로했다.
공항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가 타고 가야 할 아메리칸 에어라인 카운터에 유독 사람이 많이 몰려 있어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
어제 휴대폰으로 체크인을 하려다 실패한 나는 공항에서 다시 한번 시도했다. 그러나 여전히 체크인 화면이 뜨지도 않고, 화면 가득 영어로 쓰인 글을 대충 읽어 보아도 별 다른 안내문이 없었다.
그제야 조카가 이상하다며 내 휴대폰을 살펴보기 시작했다.(조카는 이모가 인터넷을 잘하니 어련히 잘했으려니 하고 믿고 있었다.)
내 휴대폰을 살펴보던 조카가 깜짝 놀라며
“앗!!! 이모! 이모 출발일이 내일인데요?” 하는 게 아닌가.
“무슨 말이야? 오늘이 출발일인데!!?” 나는 기절할 듯이 물었다.
“그런데 이모 비행기표에 출발일이 내일 아침으로 되어 있어요”
아뿔싸!! 동생과 나는 사색이 되어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시차를 계산하지 않고 한국 도착 날짜에 맞춰 비행기표를 예매한 것이다.
그야말로 멘붕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잠깐의 긴 시간이 흘렀다.
혹시 비행기표를 바꿀 수 있는지 차례를 기다렸다가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직원은 매우 애석하고 진지한 얼굴로 만석인 관계로 자리가 없다며 I'm so sorry 만 되뇌었다. 동생 표를 하루 미루자니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불가능하였다.
나는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몸이 약한 동생을 혼자 보내는 것도 걱정되고, 조카집에 다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하는 민폐를 끼치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너무 늙었구나! 이런 실수를 하다니... 요즘 들어 생각의 폭도 좁아지고 대처 능력도 떨어지더니 결국 이런 실수를 했구나' 하는 자바카라이 몰려왔다. 딸들한테 문제가 없는지 미리 검사 좀 맡고 올걸 하는 후회도 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후회다.
시간이 되어 하는 수 없이 동생 혼자 출발하였다. 허약한 동생이 긴 비행시간을 잘 견딜지, 무거운 캐리어를 혼자 잘 끄집어낼지, 갖가지 걱정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다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터벅터벅 조카의 차로 되돌아갔다.
공항에서 집 까지는 20여 분 거리로 가깝게 있었지만 나로 인해 내일 새벽에 다시 와야 하는 조카에게 너무 미안했다. 근처 호텔에 머물겠다고 하였으나, 조카가 응하지도 않을뿐더러 조카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 같아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조카며느리 애나는 미안해하는 내게 "이모, 괜찮아요. 우리랑 하루 더 놀다 가세요. 이모 재밌잖아요. 이모 덕분에 아주 재미있는 추억거리 생겼어요." 하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내 캐리어를 빼앗더니 앞장서서 걸어간다.
나는 내 실수에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으로 뒤 따라가고 있는데 , 조카와 애나는 연신 재미있는 일이라며 킥킥거리더니 "이모 내일 다시 모셔다 드릴게요. 편히 하루 더 쉬세요" 하며 내 어깨를 다정하게 감싼다.
조카 내외의 밝은 얼굴에 미안한 내 마음도 조금 진정되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주차장 위로 붉은 태양빛이 새벽하늘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시름을 잊고 말았다.
"와, 너무 예쁘다. 애나, 저 하늘 좀 봐!! 너무 예쁘지 않니?"
"맞아요! 이모, 너무 예뻐요."
애나와 나는 영어와 한국어를 반반씩 섞어가며 아름다운 하늘에 대한 찬사를 쏟아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기진맥진하여 침대에 벌렁 누웠고 조카들은 이층 침실로 향했다. 아직도 밖은 날이 채 밝지 않아 어둑하다.
아침이 되자 조카며느리가 생글거리며 다가와 "이모, 여기 전통 시장에 친구와 같이 가기로 했는데 이모도 같이 가실래요?" 하고 묻는다. 나는 진이 다 빠져 외출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애나가 오랜만에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갖는데 내가 따라가면 안 될 것 같아 사양했다.
"두 시간 후에 갈 거니까 혹시 이모 마음이 바뀌면 얘기해 주세요."
"애나, 이모 걱정 말고 친구랑 재미있게 놀다 오너라. 그동안 우리 때문에 친구도 못 만났잖아."
애나의 따뜻한 마음에 불편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어찌하겠나 하고 내 마음을 다스린 뒤, 나는 조카들을 위해 미안한 마음을 듬뿍 담아 저녁 식사로 김치볶음밥과 김치전을 만들어 주었다.
애나는 "이모, 정말 맛있어요!! 땡큐, 땡큐"를 연발한다.
그날 밤 나의 간곡한 부탁으로 애나와 나는 거실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다음 날 새벽 조카와 단둘이 공항으로 다시 갔다.
연 이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에 나서는 조카에게 미안해서 다시 한번 사정하듯 조카를 설득했다.
"난, 얼마든지 혼자 갈 수 있어, 공항 출입구에 내려주고 , 너는 바로 가서 좀 더 자고 출근해라. 그게 이모를 편하게 해 주는 거야."
조카는 마지못해 나를 내려주고 머뭇거린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빠르게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휴~ 이제 숨을 쉴 것 같다. 마음이 너무 편하다. 짐을 부치고 코코아 한잔을 사서 들고는, 게이트 앞에 가서 앉았다.
조카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모 지금 게이트 앞에 앉아 있으니 걱정 말고 푹 쉬거라. 그동안 애썼다. 애나한테 많이 고마웠다고 전해줘."
달콤한 코코아 한 모금을 마셨다. 온몸의 피로가 풀리며 몸과 마음이 날아갈 것 같다.
커다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어젯밤 나눈 가족 단톡방 대화를 다시 읽어 보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늙은 어미 미국 여행에 용돈만 주면 다냐? 신경도 안 쓴 딸들 덕분에 하루 더 머물다 간다아!!!"
엄마의 억지에 딸들이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아이고 엄마 ㅋㅋㅋ"
"ㅋㅋㅋ 하루 더 쉬셨다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