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캄캄한 외로운 산골에 장대 같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다.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내 마음에도 슬픈 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 밤은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저녁나절부터 내리는 장대비는 좀처럼 멎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쩌다 친구는 치매라는 무서운 지옥에 갇혀버린 것일까…
저녁을 먹고 남편은 탁구 치러 주민 체육센터에 갔다. 나 혼자서 조용히 붓글씨를 쓰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어떻게 카톡을 보냈지?” 너무 궁금해서 서둘러 카톡을 열어 보았다.
무슨 주사위를 굴리면 이모티콘을 무료로 준다는 이벤트 안내문이었다. 나는 의아했다. 친구는 카톡 보내는 것도, 이름을 검색하여 전화를 거는 것도 때때로 잊는다. 그런데 갑자기 이벤트 안내문 링크를(친구가 건강했을 때도 할 줄 몰랐다.) 걸어 내게 보내온 것이었다. 우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재미있는 이벤트네. 나도 해보라고?” 하며 답장을 보냈다.
자기가 핸드폰에 보이는 거 아무거나 눌렀더니 이런 게 나왔다며 나에게 하는 방법을 알려달란다. (혼자 있는 친구가 어떻게 카톡을 보냈는지 궁금했지만, 의미 없는 질문인 것 같아 묻지 않았다.) 나는 친구가 조금이라도 머리와 손가락을 움직여 문장을 만들 수 있도록, 카톡으로 답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친구는 뜬금없이 나에게 이런 거 보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는 카톡을 끝냈다. 어린아이처럼 의기소침해진 친구를 보니, 무너져 내리듯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 보다 한살이 많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우리가 한창 젊고 의욕이 넘치던 30대 후반쯤 동네에 있는 어느 서예학원에서였다. 늘 명랑하고 밝은 그녀와 더불어 또래 몇몇이 모여 서예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공모전에 입상도 하고 작품도 만들면서 즐겁게 서예 활동을 했다. 맞다. 뒤 돌아보면 그 시절 우리는 참 많이 행복했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들과 어울려 열심히 붓글씨를 쓰고 호호 깔깔 웃으며 누구의 작품이 더 잘 되었는지 선의의 경쟁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우리의 우정을 다져나갔다.
30여 년의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 각자의 삶으로 각각 흩어졌지만, 우리는 가끔 만나기도 하고 전화 연락을 하면서 자신들의 삶에 여념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친구의 이상을 감지한 것은 2년 전 봄이었다. 전 날 긴 시간을 웃고 떠들며 통화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다음날 전화가 와서 처음처럼 다시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혹시 나의 착각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움에 주위 친구들의 반응을 살폈더니 모두 나와 같이 느낀다고 했다.
친구는 꾸준한 치료를 받고 있음에도 점점 악화되어 이제 친구인 내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조차 전화 걸 줄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모두 알고 있기에,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말로만 듣던 치매라는 병을 이제 막 노년기에 들어선, 아직은 이른 나이에 앓게 되다니 슬픔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마음이 심란하여 펼쳐놓은 서예 쓰기를 거두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녀는 특유의 명랑함과 씩씩함으로 전화를 받았다. 우선은 안심이 되었다.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카톡 얘기는 꺼내지 않고 (조금 전에 보낸 카톡을 누구에게 보냈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안부를 물으며 이런저런 지난 이야기를 하였다. 친구는 과거를 회상하며 서예 배우러 다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고 그립다고 했다. 그럼 다시 서예를 써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된 친구는 자신이 없다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예바카라과 붓등 서예도구를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이사 다닐 때마다 소중하게 갖고 다닌다고 했다. 붓이랑 화선지는 너무 오래되어 쓰지도 못하는데 버리지 뭐 하러 갖고 다니냐고 했더니,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야!! 그게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건데. 그건 내 보물단지야. 아무도 버리지 못해!!”하면서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였다.
다 낡아빠진 서예 도구들이 자신의 보물단지라며, 30여 년간 마음속 깊이 품고 살아온 친구에게 깊은 연민과 애잔함이 스친다.
전화를 끊자마자 쿠팡 앱을 열었다. 붓과 먹물등 서예도구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친구를 돌보는 요양보호사에게 문자를 넣었다. 친구가 다시 용기를 갖고 서예를 쓸 수 있도록 옆에서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였다. 요양 보호사는 그녀가 서예 얘기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해 보인다며, 다시 서예를 써 보라고 권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그녀가 쓸 화선지도 주문해 놓았다고 했다. 얼마나 고마운지 나는 거듭 감사 인사를 하였다.
내일쯤이면 도착할 서예 도구를 받고 감격에 겨워할 친구의 모습을 상상하니, 덩달아 나도 기쁘다. 부디 더 이상 나빠지지 말고 이대로 멈춰서, 명랑하고 씩씩한 친구의 목소리를 오래오래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