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종일 단비가 내렸다.
바짝 마른 대지는 서둘러 빗물을 땅속에 모으고 더위에 지쳐버린 어린 모종들은 서서히 생기를 되찾아 허리를 곧게 편다. 사방에 빼곡히 비에 젖은 나무들은 싱그럽다 못해 초록빛을 온 마을에 내뿜는다.
비닐하우스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언제 들어도 경쾌하고 즐겁다. 차차 비가 잦아들며 앞산에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른다. 비 오는 날 이른 새벽의 산골은 적막하여 엄숙하기까지 하다.
며칠 전 이웃집에서 자신의 친구가 인삼 밭을 만들려고 2천여 평의 땅을 갈아엎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 땅에 명이나물이 가득 심어져 있는데 캐 가고 싶으면 마음껏 캐 가라고 했다며 나와 함께 가자고 하였다.
이년 전 난생처음 감자 이삭을 주우러 간 적이 있었다. 드 넓은 평야에서 감자 이삭을 발견할 때마다 무슨 보물인 양 신나서 소리 지르며 재밌게 주워왔던 추억이 떠올랐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귀한 명이나물이 아닌가.
명이 나물은 한 포기에 2~3개의 잎이 나는데, 한 포기에서 한 장의 잎만 채취해야지 두장만 채취해도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명이 나물은 비싸기도 하지만 웬만큼 심어서는 제대로 맛보기도 어렵다.
옆집 부부와 우리 부부는 마치 소풍을 가듯 간식과 음료수도 챙기고 마대 자루와 삽, 호미 등을 차에 싣고 명이 밭으로 출발했다. 30여분을 달리니 좁은 산길이 나왔다 강원도 산길답게 꼬불꼬불한 길을 계속 올라가도 2천 평이나 된다는 밭은 나오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어섰나 하고 걱정을 하면서도 인내심을 갖고 계속 올라가 보았다. 맨 꼭대기에 올라가니 정말 넓은 밭이 나왔다.
벌써 한쪽 끝에서 부터 포클레인 작업이 한창이었고, 바로 옆 빝에는 아주 실하고 싱싱한 명이들이 가득 심어져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명이나물을 칼로 쓱쓱 베어서 마대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베고 담기를 반복했다.
문득, 욕심을 부리는 내 손이 너무 부끄러워 깜짝 놀랐다. 어쩌자고 남의 명이밭에 이리 욕심을 부리는 걸까. 그동안 애지중지 심고 가꿔온 주인의 심정은 헤아려 보지도 않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저 욕심만 부리는 내 모습에 실망과 자괴감이 들었다.
마침 그때 같이 간 이웃집 남편이 “형수~! 오늘 보니 형수 손이 엄청 빨라졌는데요? 형수 손이 그렇게 빠른 줄 몰랐어요!” 한다. “그러게 말이야~ 언니 예전에 감자 캘 때 보니까 그렇게 느려서 언제 캐나 싶더니 오늘은 대단한데요.”하며 부부가 합동으로 나를 놀려댔다.
그렇지 않아도 사나운 내 욕심에 놀라서 멈칫하고 있는데 옆에서 확인시켜 주니 속으로는 많이 민망했지만 “저 많이 늘었지요? 이젠 완전한 농부가 되었다는 증거 아니에요?” 하고 능청을 떨었다.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아무리 욕심이 나더라도 체면 좀 차릴 것이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명이나물 한 포기 한 포기 정성스럽게 심어 놓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캐기 시작했다.
진정한 농부는 심어 놓은 작물에 무한한 애정이 있어야 하거늘, 애정은커녕 욕심만 가득했으니 좋은 농부가 되긴 틀린 것 같다.
캐온 명이는 우리 집 텃밭에 가지런히 심어 놓았다. 욕심껏 뜯어온 명이 나물은 우리 식구 맛볼 만큼만 장아찌를 담고, 나머지는 동생과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