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된 억지
여느 때처럼 녀석의 일터로 향한다. 그곳은 날개 달린 손님만 가득하다.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설거지를 끝낸 그는 안락의자에 철퍼덕거린다. 뭐 구경할 거리 없는 나도 옆에 털썩한다. 녀석은 이틀 전 했던 이야기를 또 꺼낸다. 복습 시간이다. 신경을 유야무야하며 듣기 훈련을 받아들인다. 마디가 끝났을까. 자신의 글을 함께 보자고 한다. 유야유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인별’에 올라온 세 장의 사진. 녀석이 적은 감사일기가 쓰여 있다. 이틀과 어제로 나뉘어 올라왔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 지장 없었다. 그 분량과 그 시간이. 자극이 남아있는 찰나에 그런 제안을 한다니.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에게 휴대전화를 받는다. 이제 1부터 엄지를 쓸어 올린다.
막 읽기 시작하는 와중 녀석이 말하기를. 스스로 쳐다볼 때 멋있는 문장이 때때로 있단다. 코웃음 나왔냐고. 그렇지 않다. 알고 있다. 그게 허풍이 아니라는 사실을. 얼핏 접했던 그저께를 상기하면 신뢰가 드는 소리다. 말마따나 강한 문장이 곳곳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아가 문단 전체가 일품인 글도 있고.
작년 글을 본 나로서 체감하게 된다. 녀석의 발전을. 집필 실력에 새삼 감탄한다. 내용을 보면 순수 상금을 위한 작문이라는 감상이 옅다. 목적이 공모전이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자연스러운 서사. 작년과 비교하면 가장 일신한 부분이다. 특별한 사건 내지 즉흥적 생각을 가나다순으로 풀어내는 능력. 생각은 사건에 비해, 다소 뜬금없이 비치는 경우가 많다. ‘왜 발생했는지’ 독자를 납득시켜야 한다. 곧 사건보다 묘사하기 어려운 이유다. 발생 원인을 궁금하지 않게 할 만큼. 몰입감을 높여도 되고.
뭐가 되었든 쉽지 않다. 사건에서 생각으로. 생각에서 생각으로. 전자마저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이도 태반인데. 녀석이 그랬다. 지금은 해냈다. 입술을 오~하고 모양 짓게 만드는 단문이 많아졌다.
솔직한 성찰. 이건 본래 잘했던 행동이다. 나만의 역사는 우리 비상금처럼 감추기 어렵다. 나도 그렇고. 자. 숨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드러내기 어려워서 그러지 않는가. 싫어서. 부끄러워서. 독식하기 위해서. 어떤 사유든 간에 어렵다는 마음은 똑같지 않은가.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은 숨기기를 택한다. 상대적인 난이도로 미루어보니 해답이 나온다.
그 어려운 행동을 녀석은 해내고 있다. 어쩌면 일기와 다른 이야기다. 인간으로서 그의 본래 성질이다. 적으며 한편으로 다른 의견을 구상한다. 이 일기로 인해 드러내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관통하는 한마디. 이 역시 23년에 비해 발전했다. 뇌리에 남는 한방은 글을 돋보이게 만든다. 필수는 아니다. 그래도 이것의 존재는 여러모로 의의가 있다. 고만고만한 글. 아니 전개 과정이 난잡한 글이어도. 저거 한 방이면 가치 상승을 이룬다.
실제 그의 24년 일기 속, 그런 글들이 제법 있다. 수준과 자극은 별개다. 내용 전체가 수려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글 역시 존재하므로. 맛난 된장찌개라고 무조건 청양고추가 송송 들어가지 않은 경우처럼. 기억력 저하도 있겠다. 나이 먹어가는 나처럼.
언급한 요소들이 나 자신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1년 전. 필자도 감사일기를 작성했던 시절이 있다. 과제나 대회 따위가 아닌 권유로 말미암아 적었다. 사유가 무엇이든 그것은 감사하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녀석도 마찬가지. 자각할지 모르겠으나 녀석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혹은 느끼는 힘이 길러졌다. 글쓰기 실력은 ‘1 더하기 1’ 행사 상품이고.
읽는 내내까지는 아니어도 종종 놀랐다. 장난치는 모습이 한결같아도 속은 조용히 자랐구나. 그 일기는 녀석의 내면적 성장을 함께 증명시킨다. 감사를 떼고 본 일기의 효용을 다시금 인지한 순간이다. 그는 토로했다. 더 쓸 내용이 없다고. 수건 한 방울 쥐어짜는 그 나름의 고충이다. 목적이 어찌 되었든 간에 시작은 분명하다. 과정이 어땠든 성장도 분명하다.
집에 돌아오고 한 시간 반. 아무 동영상에 뇌를 맡기다가 문득 떠올린다. 적어볼까. 까먹기 전에 휴대전화 수첩을 연다. 자고 일어난 밤. 바로 여기에 옮겨 적는다. 오랜만이다. 직전 경험을 바로 옮겨 적으려는 의지가 불타게 된 날. 그만큼 자극이 강했다는 의미겠지. 혹은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억지로 감사하기. 쥐어짜서 감사하기. 주최자의 설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