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베르디
진혼미사는 거의 들리지 않게 시작한다. 현이 소리를 낮춘 채 움직이고 합창이 속삭이듯 라틴어를 읊는다. 그러다 「진노의 날」에서 관현악 전체가 한꺼번에 내리 꽂히고, 대북이 박자마다 바닥을 때린다. 그 위로 피콜로가 찢고 올라오며, 합창은 비명에 가까운 음형으로 떨어진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성당 바깥에 배치해 둔 트럼펫이 안쪽 트럼펫에 응답한다.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이라는 가사를 그는 공간을 나눠 쓰는 방식으로 처리했고, 그래서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건물 전체가 울리는 상태를 경험한다.
1874년 5월 22일 밀라노의 산마르코 성당에서였다. 예순의 베르디가 백 명 규모의 관현악과 백이십 명의 합창단을 직접 지휘했다. 소설가 알레산드로 만초니가 죽은 지 꼭 일 년째 되는 날이었고, 일 년 전 같은 자리에서 그의 장례가 치러졌다. 베르디는 그 죽음의 소식을 듣고 이 곡을 쓰기 시작해 한 달 전에 완성했다.
며칠 뒤 독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신문에 짧은 평을 실었다. 교회 복장을 입힌 베르디의 새 오페라라는 것이었다. 그는 연주회에 가지 않았고 미리 받은 악보를 훑어본 상태였다.
이 평을 전해 들은 브람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뷜로가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 천재가 아니면 이런 작품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뷜로는 리스트의 제자이자 사위였고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지휘한 사람인데, 아내 코지마가 바그너에게 가면서 1869년에 그 진영을 떠났다. 그 뒤로는 브람스 쪽에 섰다. 브람스의 관현악을 독일에서 앞장서 연주한 사람이 뷜로이고, 자기 음악의 신조는 바흐와 베토벤과 브람스라는 세 개의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 사람도 뷜로다. 같은 편에 선 두 사람이 이탈리아 작곡가의 진혼미사를 놓고 정반대로 판정한 것이다.
십팔 년이 지나서야 뷜로는 이 곡을 실연으로 들었다. 그는 곧바로 베르디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 베르디는 당신에게 잘못은 없으며 어쩌면 처음 판단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짧은 답장을 보냈다.
이 답장을 쓸 때 베르디는 일흔여덟이었고, 이십 년 넘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새 오페라를 작업하는 중이었다.
그는 이탈리아가 여덟 개가 넘는 나라로 쪼개져 있던 시기에 태어나, 그 나라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보았고, 합쳐진 나라의 상징이 되었다. 오십 년 가까이 오페라를 썼고 스물여섯 편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고는 쉰여덟에 멈췄다. 십육 년 동안 새 오페라를 쓰지 않다가, 여든을 앞둔 나이에 다시 한 편을 썼다. 그가 어떻게 인정받았는지, 왜 멈췄는지, 어떻게 다시 시작했는지를 차례로 살펴보려고 한다.
1813년 10월, 이탈리아 파르마 근교 론콜레의 한 여인숙집에서 주세페 베르디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튿날 작성된 기록에 그의 이름은 프랑스어인 조제프 포르튀냉 프랑수아로 등재되었다. 그 마을이 당시 프랑스 제국 타로 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넉 달 뒤 오스트리아군이 파르마를 되찾았다. 이듬해 빈 회의는 파르마 공국을 나폴레옹의 두 번째 아내 마리 루이즈에게 넘겼고, 그녀는 1847년에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주세페 베르디는 프랑스 신민으로 태어나 오스트리아 대공비의 신민으로 자랐다. 그가 이탈리아 왕국의 국민이 되는 것은 마흔여덟 살 때의 일이다.
빈 회의가 이탈리아반도에 그린 지도는 여덟 개가 넘는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쪽의 롬바르디아와 베네토는 오스트리아가 직접 병합했고, 토스카나와 모데나와 파르마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앉았으며, 남쪽에는 부르봉 왕가의 양시칠리아 왕국이, 가운데에는 교황령이 있었다. 이 체제를 설계하고 삼십 년 넘게 관리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였다. 빈 회의의 목적은 프랑스혁명이 퍼뜨린 것을 되돌리는 데 있었고, 그는 이탈리아가 지리적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문장을 남기며 반도의 통일 움직임을 부정했다.
이 체제 아래에서 집회와 결사는 금지되었고 신문은 검열을 받았다. 그중 한 가지 예외가 오페라 극장이다.
극장은 상연 허가를 받은 합법 시설이었고, 도시에서 수백 명이 정기적으로 모여 밤을 보내는 거의 유일한 큰 공간이었다. 당시의 관람 방식은 오늘날과 달랐다. 박스석은 귀족과 부유한 시민이 시즌 단위로 빌렸고, 그 안에서 식사를 하고 손님을 맞고 카드놀이를 했다. 무대를 계속 보고 있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사교와 상거래와 소문이 그 안에서 오갔다.
당국도 이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극장을 닫는 대신 대본을 검열했다. 관리하기에는 그 편이 나았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허용하되 무대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를 통제했다.
검열을 맡은 것은 극장이 속한 나라의 관청이었다. 롬바르디아와 베네토에서는 오스트리아 총독부와 경찰이, 나폴리에서는 부르봉 왕가의 검열관이, 로마에서는 교황청 관리가 대본을 읽었다. 상연 허가는 이들의 결재를 거쳐야 나왔다.
1851년 베네치아 초연을 앞둔 《리골레토》가 그 예다. 원작은 빅토르 위고의 희곡 《왕은 즐긴다》이고, 방탕한 프랑스 왕과 그를 섬기는 꼽추 광대의 이야기다. 광대는 왕의 놀이에 가담해 신하들을 조롱하다가 저주를 받는다. 왕이 그의 딸을 유혹하고, 광대가 자객을 사서 왕을 죽이려 하자 딸이 대신 칼을 받는다. 원작은 파리에서 상연 첫날 이후 금지되었다. 1850년 12월, 베네치아 주둔 오스트리아 군사 총독 카를로 데 고르츠코프스키가 이 대본의 상연을 불허했다. 왕이 무대에서 여자들을 희롱하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베르디는 대본가 피아베가 준비한 순화 판본을 거부하고 검열 당국과 항목별로 협상했다. 왕은 만토바의 공작으로 격하되었고 작품 제목도 바뀌었지만, 저주와 꼽추와 자루에 담긴 시체는 남았다. 초연은 1851년 3월 11일에 이루어졌고 결과는 큰 성공이었다.
1859년의 《가면무도회》도 같은 일을 겪었다. 스웨덴 국왕이 무도회장에서 암살당하는 실제 사건이 소재였는데, 결국 무대를 북아메리카 보스턴으로 옮기고 왕을 총독으로 바꾼 뒤에야 올라갔다.
베르디의 오페라가 다룬 시공간은 넓다. 바빌론과 예루살렘, 1차 십자군, 훈족의 아틸라, 중세 스코틀랜드, 16세기 스페인 궁정, 18세기 스웨덴, 파리의 사교계, 고대 이집트, 베네치아령 키프로스까지 있다.
이렇게 다양한 폭을 다룬 데에는 두 가지가 겹쳐 있다.
하나는 검열이다. 현재의 이탈리아를 무대에 올릴 수 없으니 시대와 나라를 옮겨야 했다. 옮기면 같은 이야기가 통과되었다. 억압받는 민족의 합창을 바빌론 유수의 히브리인이 부르면 성서 이야기가 되고,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의 롬바르디아인이 부르면 상연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문학 시장이다. 19세기 전반의 유럽에서 희곡과 소설은 번역되어 국경을 넘나드는 상품이었다. 베르디는 다양한 작품을 읽었고 거기에서 소재를 골랐다. 실러에게서 네 편을 가져왔고, 빅토르 위고에게서 두 편을, 바이런과 뒤마 피스에게서 각각 가져왔다. 그가 고른 것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 성공한 이야기들이었고, 극적 구조가 검증된 재료였다.
그중에서도 셰익스피어는 베르디에게 특별했다. 그는 1847년에 오페라 《맥베스》를 작곡했고, 이 작업에서 대본을 대본가에게 통째로 맡기지 않았다. 극 전체를 산문으로 먼저 옮겨 막과 장과 음악 번호의 배치를 정한 다음, 대본가 피아베에게 넘겨 운문으로 바꾸게 했다. 노래 한 대목에 몇 행이 필요한지, 합창 한 줄에 몇 음절이 들어가야 하는지까지 지정했다. 셰익스피어를 오페라로 옮기는 과정에서 무엇이 깎여 나가는지를 그가 직접 관리하려 했다는 뜻이다.
3월 14일 피렌체 페르골라 극장에서 《맥베스》가 초연되었고 관객은 열광했다. 다만 이상하다는 반응이 함께 따라붙었다. 사랑 이야기가 없는 오페라라는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연인 한 쌍과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는 사실상 필수 요소였고, 그것 없이 극이 굴러가는 작품은 낯설었다. 비평가들이 문제 삼은 것은 원작의 무게를 오페라가 감당했느냐였다.
셰익스피어를 오페라로 옮기려는 욕심은 다음 작품으로 이어졌다. 그는 1850년에 《리어왕》을 오페라로 만들려고 대본가 캄마라노에게 의뢰했다. 캄마라노가 1852년에 죽자 안토니오 솜마에게 넘겼고, 솜마는 두 차례에 걸쳐 완성된 대본을 써냈다. 베르디는 장면 수를 줄이라고, 인물을 덜어 내라고, 대사를 짧게 하라고 거듭 요구했다. 1858년 나폴리 시즌에 올릴 작품으로 이것을 고려하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쓰지 않았다. 십오 년 동안 붙들고 있다가 결국 음악을 붙이지 못한 것이다.
소재의 폭이 넓었던 것은,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었던 결과다. 검열은 무대를 다른 시대와 다른 나라로 옮기게 만들었고, 유럽의 문학 시장은 옮겨 갈 이야기를 공급했다. 그가 다룬 시공간의 목록은 취향의 목록이 아니라 통과할 수 있었던 자리의 목록이다.
그리고 그 두 조건이 다 갖춰지고도 무대에 오르지 못한 작품이 하나 있었다. 《리어왕》은 검열이 막은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멈췄다. 그 뒤 삼십 년 가까이 그는 셰익스피어를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다시 손을 대는 것은 일흔이 넘어서의 일이었다.
《나부코》 3막에는 바빌론에 끌려온 히브리인들이 고향을 그리며 부르는 합창이 있다. 「가라,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로 시작하는 이 곡은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사실상의 국가처럼 불리며, 통일 운동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의 이탈리아인이 자기 처지를 그 히브리인에 겹쳐 놓았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골자다.
리소르지멘토는 다시 일어섬을 뜻하는 말이고, 19세기 이탈리아에서 반도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려던 일련의 운동을 가리킨다. 마치니의 비밀결사와 가리발디의 원정, 사르데냐 왕국의 전쟁과 외교가 여기에 들어간다. 1859년과 1860년의 전쟁을 거쳐 1861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했고, 1870년에 로마가 수도가 되면서 지도가 완성되었다.
이 운동의 구호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것이 있다. 이탈리아어 비바는 만세라는 뜻이다. 벽에 적힌 VIVA VERDI를 그대로 읽으면 작곡가에 대한 환호가 되지만, 그 다섯 글자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칭호, 즉 Vittorio Emanuele Re D'Italia의 머리글자로 읽으면 국왕 만세가 된다. 오스트리아 경찰이 지우기 어려운 낙서인 셈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 바카라에 실려 있다. 다만 당대의 기록보다 후대의 서술에 훨씬 많이 남아 있다. 같은 문제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도 있다. 1842년 《나부코》 초연에서 관객이 앙코르를 요구한 합창은 이 곡이 아니라 마지막에 나오는 다른 합창이었다는 것이 근래 연구로 확인되었다. 이 곡이 국가처럼 불리게 된 것은 통일이 이루어진 뒤의 일이고, 이 곡을 리소르지멘토의 노래로 못 박은 서술의 출처를 추적하면 20세기 중반의 전기에 닿는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하자 베르디는 하원 의원이 되었다. 본인이 원해서 나선 것이 아니라 재상 카보우르가 여러 차례 권유한 결과였고, 그는 1865년까지 의석을 지켰다. 회의장에서 그가 한 일은 거의 없다. 발언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그는 표결에서 카보우르를 따라가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새로 만들어진 의회가 그에게 요구한 것은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이름이었다. 반도 전역에서 상연되는 오페라의 작곡가가 새 왕국의 의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의 정당성을 보여 주는 장면이 되었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나라는 공유할 기억이 필요했고, 마침 살아 있는 작곡가가 그 자리에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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