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슈만
1831년 12월 7일, 라이프치히의 《일반 음악 신문》에 평론이라기엔 좀 이상한 글이 실린다. 쓴 사람은 스물한 살의 로베르트 슈만이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플로레스탄과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그때 오이제비우스가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온다. 창백한 얼굴에 사람을 애태우는 미소를 띠고서 그는 악보 한 부를 내려놓으며 말한다.
"모자를 벗으시오, 여러분. 천재요."
동갑내기 폴란드 청년이 열일곱에 쓴 변주곡이었다. 프레데리크 쇼팽의 작품 2번. 그의 평론에 등장하는 플로레스탄도 오이제비우스도 실재하지 않는다. 둘 다 슈만이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불타오르며 밀어붙이는 쪽이 플로레스탄, 조용히 꿈꾸며 오래 곱씹는 쪽이 오이제비우스다. 그 글에는 세 번째 인물도 이미 이름을 내민다. 마이스터 라로. 두 사람이 다투다 결론이 나지 않을 때 판정을 내리는 어른이다. 라로라는 이름은 아내 클라라와 슈만의 이름인 로베르트를 겹쳐 만든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 장치의 출처는 소설이다. 슈만이 좋아한 소설가 장 파울은 작품 속에서 늘 자기를 두 사람으로 갈라놓았다. 슈만도 그 점을 적어 둔 적이 있다. 그는 그것을 빌려 왔고, 평론에만 쓰지 않았다. 〈카니발〉과 〈다비드동맹 무곡집〉에는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각각 이름을 달고 들어가 있다. 격정적인 곡에는 F를, 소박한 곡에는 E를 붙였다. 자기 이름으로 내놓지 않고 안에 있는 두 인물에게 나눠 맡긴 셈이다.
그가 살던 낭만주의 시대는 남과 다른 자아를 갖는 일이 처음으로 예술가의 자격 조건이 된다. 독창성이 최고의 덕목이 되자 기행은 결격 사유가 아니라 이력이 되었고, 광기마저 재능의 증거로 여겨졌다. 호프만은 크라이슬러라는 미치광이 악장을 자기 분신으로 내세워 글을 썼고, 슈만은 훗날 그 이름을 빌려 〈크라이슬레리아나〉를 쓴다. 시대가 대본을 주었고, 슈만은 그 시대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연기한 사람이었다.
그는 재료를 가공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가공했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약한 넷째 손가락을 기계 장치에 걸어 단련하다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아가 창작에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자아도 둘로 나눴다. 몸이 이상에 못 미치면 몸을 고쳤고, 자아가 모자라면 자아를 증축했다. 최대치까지 끌어올리는 것, 그가 아는 방법은 대체로 그것이었다.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 두 자아는 처음에는 그를 지켰다. 다투는 구조를 자기 안에 지어 놓았기에 어느 한쪽으로 굳지 않을 수 있었고, 그의 평론가로서도 음악가로서도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자기를 밀어붙이려고 만든 그것이 점차 슈만 자신을 갉아먹었다. 손가락의 결말은 일찍 왔고, 정신의 결말은 그보다 훨씬 느리게 왔다.
스물두 해 뒤, 오래 붓을 놓았던 슈만이 다시 평론을 쓴다. 1853년 10월 28일, 자신이 창간한 《신음악 신보》에 실린 〈새로운 길〉이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시대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표현하도록 부름 받은 자가 나타날 것이다. 그 사람은 숙련을 단계적으로 쌓아 올리는 대신 미네르바처럼 신의 머리에서 완전히 무장한 채 튀어나오리라! 그리고 그가 왔다. 요람 위를 그라치아와 영웅들이 지켜본 청년이다.'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브람스. 무명의 브람스는 음악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숙련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신의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자. 천재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브람스 자신에게는 그렇게 씌워진 관의 무게가 무거웠던지 슈만의 글에서 예고된 교향곡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스물세 해가 걸린다.
우리는 지금도 천재라는 단어를 쓴다. 어떤 사람의 결과물이 설명되지 않을 때 그 단어를 꺼내 놓고 설명을 멈춘다. 그 말을 쓰는 순간 그 사람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가고 더 알아볼 것이 없어지니 편리하다. 천재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되므로,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처럼 비교하다가 끝내 파멸하게 된다. 슈만은 남에게는 두 번 천재라는 관을 씌웠다. 쇼팽에게 그리고 브람스에게. 자기에게는 천재라는 말을 끝내 쓰지 못했다.
1854년 2월 27일, 비 내리는 사육제의 뒤셀도르프. 실내복과 슬리퍼 차림에 모자도 쓰지 않은 남자가 라인강 배다리로 걸어간다. 통행료를 낼 돈이 없어 손수건을 내민다. 그렇게 다리에 들어선 그는 한가운데까지 걸어가 강으로 뛰어들었고, 뱃사람들이 곧 그를 건져 올렸다. 집에 돌아온 그는 쓰다 만 변주곡을 이튿날 마저 끝냈다. 천사가 불러 준 선율이라고 했다. 몇 해 전 자기가 이미 쓴 선율이라는 것은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스스로 청해 요양원에 들어갔고 스물여덟 달 뒤, 그곳에서 마흔여섯의 나이로 숨졌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손가락을 장치에 걸고, 자아를 나누고, 잡지를 만들고, 무명 청년을 언제 어떻게 세상에 내보낼지 시기를 쟀던 사람. 슈만이 남긴 것은 재능의 증거라기보다 결정들의 목록에 가깝다.
이 바카라은 그 목록을 읽는다.
천재라는 틀로 작곡가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다. 바흐가 죽은 1750년만 해도 그는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이되 작풍은 한물갔다는 평을 듣던 사람이었다. 반세기 뒤인 1802년, 포르켈이 최초의 바흐 전기를 낸다. 부제가 '진정한 음악 예술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을 위하여'였고, 바카라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지금까지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가장 위대한 음악의 시인이자 웅변가였던 이 사람은 독일인이었다. 조국은 그를 자랑스러워하라. 나폴레옹이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던 무렵, 통일된 국가가 아직 없던 독일어권에서 음악은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산이었고 작곡가는 그 자산의 이름표가 되었다. 1829년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되살렸고, 호프만의 글을 거치며 베토벤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뷜로는 바흐와 베토벤과 브람스를 묶어 세 개의 B라고 불렀다. 셋 다 독일인이다. 이후 세계 각국의 음악원이 가져다 쓴 서양음악사는 상당 부분 이 목록이었고, 그 목록에 붙은 설명이 천재성과 영감과 초월적 재능이었다.
오늘날 음악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그 반대편을 본다. 슬롯학자 티아 드노라는 베토벤이 빈에 도착한 1792년부터 1803년까지를 들여다보며, 그의 천재라는 평판이 음악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정리했다. 오케스트라를 통째로 거느릴 형편이 못 되게 된 빈의 구귀족들에게는 자기들의 문화적 우위를 증명해 줄 다른 방식이 필요했고, 진지한 음악과 그 음악을 쓰는 특별한 인물이 그 자리를 채웠다는 것이다. 베토벤 자신도 그 판을 다룰 줄 알았다. 비슷한 시선으로 보면 바흐는 봉급과 근무 조건을 두고 시 당국과 다투던 고용인이었고, 하이든은 삼십 년 가까이 제복을 입고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지시에 따라 곡을 납품한 직원이었으며, 헨델은 흥행이 안 되면 극장을 접어야 했던 사업가였다. 조건이 바뀌면 음악도 바뀌었다. 악보의 모양은 재능만이 아니라 계약서와 극장 좌석 수와 연주자의 숫자가 함께 결정했다.
지금 우리도 매일 무언가를 만들어 내놓는다. 도구는 어느 때보다 많다. CD가 팔리던 1980년대에 전 세계에서 새로 나온 녹음은 한 해 이삼만 건, 하루로 치면 백 건이 되지 않았다. 지금 스트리밍 서비스에 하루 들어오는 신곡은 십만 곡을 넘는다. 쌓여 있는 곡은 이억오천만 곡이 넘고 그중 절반에 가까운 수는 한 해 동안 재생 횟수가 열 번에 미치지 못한다. 만드는 일이 쉬워질수록 살아남기는 어려워지고 지속되기는 더 어려워진다.
클래식 음악가들은 몇백 년이 지나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음악, 정전이 된 클래식을 만든 이들이다. 앞으로 만날 사람들은 마감과 제약과 빚에 쫓기던 이들이다. 천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의 음악가를 만나 보려고 한다. 베토벤은 악보 첫 장에 써넣은 플루트를 그어 버렸고, 헨델은 스무나흘 안에 납품하기 위해 자기 옛 악보를 다시 꺼냈으며, 시벨리우스는 삼십 년을 붙들고 있던 교향곡을 벽난로에 넣었다. 로시니는 서른일곱에 작곡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들이 남긴 악보는 선택과 집중의 기록이다. 그들이 무엇을 남겼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은 이들을 나와 무관한 천재로 세워 두는 것보다 훨씬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