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 판 베토벤
네 개의 음표만 남기고 다 버린 날
1808년 12월 22일 저녁 여섯 시 반, 빈의 테아터 안 데어 빈에 사람들이 베토벤의 신작을 듣기 위해 모여 앉았다. 난방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날의 프로그램은 네 시간을 넘겼고 그 안에 교향곡 두 곡과 피아노 협주곡, 합창 환상곡, 미사의 일부가 들어 있었다.
연주자들은 급조된 편성이었다. 당시 빈에는 상설 오케스트라가 없었으므로 연주회를 여는 사람이 악사를 한 명씩 직접 구하고 보수를 흥정해야 했다. 하필 그날 저녁 극장 전속 악단의 상당수는 음악가 유가족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 잡혀 있었고, 빈자리는 아마추어로 메워졌다. 함께 연주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리허설은 제도는커녕 관행으로도 자리 잡기 전이었다. 그 시절 가장 이름난 아마추어 악단도 연주회 한 번에 리허설 한 번이 보통이었고 그마저 절반만 나타났다. 그날 객석에 있던 작곡가 라이하르트는 초연될 곡들이 하나같이 극도로 어려운데 전체를 한 번 맞춰볼 시간조차 확보되지 못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여섯 시 반부터 열 시 반까지 혹독한 추위를 견뎠다고 덧붙였다.
교향곡 5번은 그 네 시간 어딘가에서 처음 울렸다. 오늘 우리가 첫 네 음만 듣고도 나머지를 떠올리는 그 작품은 초연 당일에는 다른 초연들 사이에 끼여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지금 이 곡은 베토벤이라는 이름을 대신하는 소리가 되었다. 그의 아홉 개 교향곡 중 어느 것보다도, 그가 쓴 어떤 악보보다도 이 네 음이 그를 설명한다. 이 네 음은 정면으로 부딪치고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다. 우리가 베토벤이라는 인간을 떠올릴 때 사실상 떠올리는 것은 이 네 음의 성격이다.
네 개의 음이 나오기까지 4년이 걸렸다.
첫 스케치는 1804년에 나타난다. 3번 교향곡 〈에로이카〉를 끝낸 직후다. 그리고 곧 밀려난다. 오페라 〈피델리오〉가 끼어들었고 라주모프스키 사중주 세 곡이, 피아노 소나타 〈열정〉이, 바이올린 협주곡이, 4번 교향곡이 차례로 끼어들었다. 5번은 그 사이사이의 틈에서 자랐다. 그 4년 동안 그가 한 일의 대부분은 쓰는 일이 아니라 지우는 일이었다.
베를린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자필 악보의 첫 페이지에 그 과격한 지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케스트라 작품인데도 그는 첫마디에서 악단 전체를 쓰지 않았다. 오보에와 바순, 호른과 트럼펫, 팀파니를 빼고 현악과 클라리넷만 남겼다. 그 안에서도 플루트를 또 지웠다. 한 번 써넣었다가 그어 버렸다. 이미 여럿을 덜어내고 또 덜어냈다.
우리가 아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시작은 그 마지막 삭제 뒤에 남은 소리다. 짧은 음 셋에 긴 음 하나, 음표로 쓰면 단 네 개다. 베토벤은 이 동기 하나로 30분이 넘는 교향곡 전체를 지어 올렸다. 1악장은 이 동기의 집요한 반복이고, 2악장에서는 변형되어 숨죽여 흐르다가 팡파르처럼 터져 나오며, 3악장에서 호른의 외침으로 다시 전면에 서고, 4악장의 환희 속으로 스며든다. 귀에 들리는 선율만이 아니다. 그 뒤를 받치는 화음과 리듬의 흐름까지 첫 동기의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대한 건물이 벽돌 한 장에서 출발해 결국 그 벽돌로 수렴하는 구조다.
같은 해, 파리에서도
그런데 이 발상이 그의 머릿속에서만 자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1808년, 파리에서 에티엔 니콜라 메윌이 교향곡 1번 g단조를 쓰고 있었다. 그 곡의 마지막 악장은 짧은 리듬 동기 하나를 물고 늘어지며 전개되고, 3악장에서는 당시로서는 드물던 현악기의 피치카토가 쓰인다. 5번 교향곡의 1악장과 3악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낯익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30년 뒤 로베르트 슈만이 이 유사성을 발견하고 한쪽이 다른 쪽을 기억한 것이 틀림없는데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고 평론에 적었다. 두 곡은 같은 해에 각자의 도시에서 쓰였고 초연도 거의 동시였기 때문에 어느 쪽이 베꼈다고 볼 수 없다. 파리와 빈 사이에서 악보가 오갈 시간은 없었다.
짧은 조각 하나를 붙들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은 당시 유럽의 공기 중에 이미 떠 있었고, 두 사람이 각자 그것을 붙잡았다. 한 사람은 그것을 곡의 일부로 썼고, 다른 한 사람은 거기에 교향곡 전체를 걸었다.
새로운 길
1802년 어느 날, 서른한 살의 베토벤이 친구 크룸홀츠에게 여태까지의 자기 작풍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오늘부터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제자 체르니가 40년 뒤 회고록에 옮겨 적은 문장이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 무렵 그의 악보가 실제로 방향을 바꾼 것은 사실이다.
이 결심이 나온 계기를 더듬어보면 그 성격이 분명해진다. 같은 해 가을 그는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청력을 잃어가는 처지와 죽음에 대한 고뇌를 적은 그 문서를 그는 부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서랍에 넣어 두었다. 귀가 닫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인간이 같은 해에 내린 결론은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맞서고 지금까지의 자기 작업을 부정하며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1802년 10월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에 편지를 보내 새로 쓴 변주곡 두 세트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렸다.
이 문장이 그 시대에 어떻게 들렸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전까지 작곡가가 자기 작품을 팔 때 내세우는 것은 쓰임새였다. 어떤 편성으로 연주할 수 있는지, 어느 자리에 어울리는지, 아마추어가 집에서 칠 만한 난이도인지. 새로움은 그 목록에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낯선 것은 팔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베토벤은 그 목록의 맨 앞에 새로움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시도가 먹혔다. 출판사는 그 새로움을 사들였고 이후 유럽의 악보 시장은 새로움에 값을 매기기 시작했다. 예술가의 미덕이 잘 만드는 것에서 남과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전환이 상거래의 언어로 먼저 나타난 셈이다.
시장을 읽는 눈은 다른 데서도 보인다. 당시 유럽에는 국경을 넘는 저작권이 없었으므로 그는 같은 곡을 빈과 라이프치히와 런던의 출판업자에게 시차를 두고 넘겨 여러 번 값을 받았다.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 스케치를 버리지 않았다. 평생 쓴 스케치 낱장을 직접 묶어 수십 권의 노트로 만들었고 죽을 때까지 갖고 있었다. 1827년 유품 경매에 나온 그 노트들은 안타깝게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낱장만 수천 장에 이른다. 그 종이 위에서 하나의 주제가 열 번 스무 번 고쳐 쓰이고 어떤 것은 몇 해를 건너뛰어 다시 나타난다. 5번 교향곡의 네 음도 그중 하나다. 떠오른 것을 받아 적은 흔적이 아니라 붙들고 씨름한 흔적이다.
그의 유품 목록에는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 플루타르코스, 괴테와 실러가 있었다. 그는 칸트의 문장을 대화 수첩에 옮겨 적었고 프랑스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상을 자기 작품의 재료로 삼았다. 3번 교향곡의 표지에 나폴레옹의 이름을 썼다가 지운 일화가 유명하지만, 정작 눈여겨볼 것은 그가 정치의 언어를 음악의 언어로 옮길 수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까지 악기만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맡은 일은 대체로 자리를 채우는 것이었다. 귀족이 식사하는 동안 흐르고, 손님이 들어올 때 울리고, 무도회의 발을 맞추는 데 쓰였다. 아무도 그런 음악에 무엇을 말하려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베토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음악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에로이카〉의 2악장은 실존하지 않는 어떤 영웅의 장례 행진이고, 5번 교향곡은 c단조에서 출발해 C장조로 끝난다. 가사도 줄거리도 없이 절망에서 승리로 건너가는 한 인간의 궤적을 소리의 배열만으로 주장했다.
자기 이력을 관리하는 방식 또한 근대적이다. 그는 본에서 이미 상당한 양을 썼지만 그중 어느 것에도 작품 번호를 주지 않았다. 빈에 온 뒤 스물넷에 발표한 피아노 삼중주 세 곡에 처음으로 작품 1이라는 번호를 붙였다. 자기 역사의 시작점을 자기가 정한 것이다. 무엇을 남길지 이전에 무엇을 자기 목록에 넣을지부터 선택이었다.
후대라는 청중
인류가 만든 소리의 대부분은 만들어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18세기까지 음악은 대체로 소모품이었다. 궁정은 새 행사에 새 곡을 요구했고 교회는 절기마다 새 곡을 썼으며 청중은 지난 시즌의 음악을 다시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바흐가 죽은 뒤 그의 이름이 좁은 전문가 집단 바깥에서 거의 잊힌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정상이었다. 작곡가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 가까웠다. 만들면 먹히고, 먹히면 없어졌다.
후세에 남겠다는 열망 자체는 오래된 것이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미 청동보다 오래갈 기념비를 세웠다고 썼다. 다만 음악에서는 그것이 오랫동안 실현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악보가 널리 인쇄되지 않았고 죽은 사람의 곡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관행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헨델의 작품들이 그의 사후에도 계속 연주되면서 처음으로 예외가 생겼고, 베토벤은 그 예외가 규칙으로 바뀌던 시기에 활동했다.
베토벤 생전에 5번 교향곡은 유럽 여러 도시에서 반복해서 연주됐다. 새 곡이 옛 곡을 밀어내는 대신 옛 곡이 계속 살아남아 목록이 되기 시작했다. 음악이 소비되는 물건에서 보존되는 작품으로 바뀌던 전환의 첫 세대가 그였고,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후대는 그에게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청중이었다.
1807년 초, 라주모프스키 백작이 의뢰한 현악사중주가 빈에서 연주됐다. 너무 길고 너무 어려웠다. 한 이탈리아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이것도 음악이냐고 물었을 때 베토벤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중 시대를 위한 것입니다. 눈앞의 청중이 판정할 수 없다면 판정을 미래로 넘기면 된다. 자기 작품이 자기보다 오래 살 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계산이다.
이 계산은 곧 계약서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1808년 가을, 나폴레옹의 동생인 베스트팔렌 왕이 베토벤에게 카셀의 궁정악장 자리를 제안했다. 당대의 궁정악장은 작곡가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로, 안정된 봉급과 지위가 걸려 있었고 경쟁 또한 치열했다. 베토벤은 그 제안을 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빈에 퍼뜨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소문을 들은 빈의 후원자들이 움직였다. 협상 끝에 1809년 3월 1일, 루돌프 대공과 로프코비츠 공작과 킨스키 공작이 서명한 계약서가 만들어졌다. 조건은 연 4000 플로린의 종신 연금, 연주 여행의 자유, 궁정악장이라는 칭호, 그리고 매년 한 번 자기 이익을 위한 연주회를 열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그가 해야 할 일은 빈에 남는 것 하나뿐이었다.
4000 플로린이 어떤 돈이었는지는 옆자리와 비교해 보면 드러난다. 당시 궁정악장 살리에리의 연봉이 1200 플로린이었다. 베토벤이 1807년 궁정극장에 2400 플로린을 요구했을 때는 터무니없다는 반응과 함께 신청이 거절됐다. 하지만 그가 결국 받아낸 액수는 제국 최고 자리의 세 배가 넘었다.
그 계약서는 몇 세대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문서로, 진정한 예술가라면 큰 작품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자리를 얻어야 하며 생계의 계산에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누구도 그에게 무엇을 언제까지 쓰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대가로 지불된 돈이었다. 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은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체제 안에 있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제복을 입고 하인 명부에 이름을 올린 채 일했다. 모차르트는 그 체계에서 빠져나오려다 빚과 불안정 속에서 생을 마쳤다. 베토벤은 빠져나온 정도가 아니라 조건을 자기가 썼다. 그가 만든 것은 네 개의 음이 아니라 작곡가라는 직업의 새로운 정의였다.
그러나 그 돈은 2년 만에 대부분 증발한다. 전쟁이 이어지며 오스트리아 화폐가 무너졌고, 서명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은 파산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낙마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머지를 받아내기 위해 법정까지 갔다. 자기 직업을 새로 정의한 사람도 시대의 인플레이션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왜 하필 가장 작은 동기를 사용했을까
베토벤 이전 시대 음악의 의미는 바깥에서 왔다. 가사가 뜻을 줬고 전례가 음악의 순서를 줬고 춤에서 반복의 형식이 나왔다. 말이 없는 소리는 자신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스스로 답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베토벤의 시기에 음악의 내부에서도 지각이 움직이고 있었다.
궁정과 교회의 후원이 약해지고 공공 연주회장과 악보 시장이 열리면서 기악은 처음으로 시민 청중 앞에 텍스트 없이 혼자 서야 했다. 말이 빠진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와야 했다. 논리였다. 그리고 그 논리의 최소 단위는 동기였다. 동기는 음악에서 의미를 갖는 가장 작은 단위로 정의되는데, 여기서 의미란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된다는 뜻이다. 이 최소 단위로 한 곡을 축조하는 문법을 다듬은 사람은 하이든이었고 그 실험실은 현악사중주였다. 네 개의 악기가 동등하게 대화하려면 재료는 길고 완결된 선율이 아니라 짧고 주고받을 수 있는 조각이어야 했다.
시대의 사상이 이 방식에 보증을 섰다. 당시 독일 지성계는 하나에서 전체가 자라나는 유기체를 이상적인 형태로 여겼다. 괴테는 식물의 모든 기관이 잎 하나의 변형이라고 생각했다. 꽃잎도 꽃받침도 수술도 전부 같은 것의 다른 모습이라는 뜻이다. 예술작품도 그래야 했다. 부분들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핵에서 필연적으로 자라난 생명체야말로 진정한 자연을 담은 예술이라는 것이다.
1810년,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E.T.A. 호프만이 5번 교향곡에 관한 긴 평론을 발표한다. 그는 이 글에서 말에 기대지 않는 기악이야말로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라고 선언했고 그 증거로 이 곡을 마디 단위로 해부했다. 전체가 단순한 동기 하나에서 자라난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위대함의 증명이었다. 노래의 반주쯤으로 취급되던 기악이 철학적 지위를 갖는 예술로 승격된 순간이었고, 그 담보는 네 개의 음이었다.
베토벤은 더 화려한 선율, 더 웅장한 주제를 고를 수 있었지만 거의 아무것도 아닌 동기를 골랐고 곡이 끝날 때까지 끈질기게 밀어붙였다. 청중이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정교한 구조가 아니라 리듬의 운동이다. 처음 들릴 때는 충격이고, 두 번째 들릴 때는 예상이 되며, 세 번째 들릴 때는 거스를 수 없는 필연이 된다. 복잡한 선율은 귀를 즐겁게 할지언정 기억하기 어렵지만, 단순한 동기는 몸에 각인된다. 시대가 요구한 철학을 가장 집요한 형태로 제출한 것이다.
하나의 소리, 두 개의 세계
이 네 음의 파급력은 한 세기 뒤 극단적인 두 장면에서 드러난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BBC는 유럽 점령지 방송의 시그널로 이 동기를 채택했다. 모스 부호에서 승리를 뜻하는 V, 점 셋에 선 하나가 따따따 딴의 리듬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나치 점령 아래 숨죽이던 이들에게 이 네 음은 우리가 아직 싸우고 있다는 암호였다.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서 목숨을 걸고 라디오를 숨겨둔 사람이 매일 밤 이어폰 너머로 가장 먼저 들은 소리도 이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같은 음악이 전혀 다른 곳에서도 울렸다. 나치의 선전 방송이었다. 그들에게 베토벤은 게르만 정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도구였고 5번 교향곡은 지배의 선언이었다. 같은 네 음이 한쪽에서는 저항의 신호였고 다른 쪽에서는 압제의 상징이었다.
음악은 스스로 의미를 닫아두지 않는다. 재료가 단순할수록 그 안에 담기는 감정과 역사의 무게는 오히려 커진다. 만약 이 곡의 얼굴이 길고 화려한 선율이었다면 모스 부호와 겹칠 일도, 어둠 속에서 기억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네 개뿐이었기 때문에 국경을 넘었고, 네 개뿐이었기 때문에 서로 적대하는 두 세계가 동시에 자기 것이라 주장할 수 있었다. 나중 시대를 위한 것이라던 말은 이렇게 회수됐다. 다만 그가 예상한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번 뿐이었던 방식
돌아보면 동기 하나로 건물을 짓는 이 방식은 음악사 전체에서 예외에 가깝다. 하이든에서 브람스와 말러에 이르는 대략 한 세기 반, 독일어권 기악이라는 좁은 지대에서 집중적으로 번성했고 그 앞에도 뒤에도 중심이 된 적이 없다.
오늘의 음악은 다시 선율과 노래의 시대다. 대중음악은 성악과 춤의 오랜 전통을 잇는 직계 후손이어서 의미는 가사와 목소리가 운반하고 형식은 절과 후렴이 감당한다. 후크는 동기와 닮았지만 결정적인 지점에서 다르다. 반복될 뿐 발전하지 않는다. 동기발전은 30분 동안 한 방향으로 귀를 붙들어 두는 청취, 곧 연주회장이라는 제도를 전제로 한 기술이었고 3분의 형식에는 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유산이 지금 가장 뚜렷하게 살아 있는 곳은 오히려 영화관이다. 인물마다 동기를 붙이고 이야기를 따라 변형시키는 영화음악의 기법이 그 계보를 잇는다.
그러니 5번 교향곡은 어떤 시대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한계를 넘은 물건이다. 텍스트 없는 음악이 스스로 서기 위해 발명된 문법이, 정작 텍스트를 잃어버린 인간들, 수용소의 어둠 속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이들에게 가장 큰 말이 되었다.
기억은 풍부함이 아니라 각인에서 온다. 각인은 반복에서 오고 반복은 선택에서 온다. 그렇게 새겨진 것만이 가장 강렬한 감정을 남긴다. 열 가지를 나열한 사람보다 한 가지를 파고든 사람이 기억에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토벤의 자필 악보 첫 페이지에 남은 것은 재능의 증거가 아니다. 써넣었다가 그어 버린 플루트, 이미 덜어낸 자리에서 한 번 더 덜어낸 손의 기록이다.
따따따 딴.
이 네 음은 수용소의 밤에도, 점령군의 행진 속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울린다. 단순한 것이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