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남과 나를 견준다. 화면 속에서 누군가 여행을 다녀오고, 누군가 승진하고, 누군가의 아이가 상을 받는다. 그럴 때 마음이 잠깐 내려앉는다. 나는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부러워하려던 것도 아닌데 어느새 나를 그 옆에 세워 놓고 있다.
남과 견주는 동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잣대가 있다. 집, 차, 월급, 자녀의 성적, 남들에게 보이는 표정.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초가 얼마나 남았는지도, 어떤 결로 타고 있는지도 알려 주지 않는다.
우리도 이미 시간을 돈과 바꾸며 산다. 하루 여덟 시간을 일한다는 것은 내 초의 일부를 녹여 다른 무언가와 교환한다는 뜻이다. 그 교환이 헛된 것은 아니다. 그 시간으로 밥이 차려지고, 아이들이 자라고, 집이 유지된다. 나는 그 시간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 그것도 누군가의 곁을 밝히는 불이다.
문제는 얻는 것 없이 녹는 시간이다. 남과 견주는 동안 흘러간 시간은 어디에도 교환되지 않는다. 남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쉰 삼십 분은 내 초에서 그만큼 녹았는데도 손에 남는 것이 없다. 그 사이 내 불은 내가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조용히 타고 있었다.
멀어진 사람의 SNS를 계속 들여다보게 되는 때가 있다. 사이가 틀어졌거나, 서운한 일이 있었거나,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누구와 웃고 있는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진다. 나는 이렇게 신경 쓰는데 저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사는구나 싶어 서운해지기도 한다. 그 마음은 자연스럽다. 아직 내 안에서 끝나지 않은 일이니까.
그렇게 화면을 보는 동안에도 내 초는 녹고 있었다. 상대는 그 시간을 알지도 못한 채 자기 하루를 살고, 내 하루만 그 화면 앞에 묶여 있었다. 삶을 조금씩 좀먹는 일이다. 다만 그 시간이 상대가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내어 주고 있는 시간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남의 불빛은 멀리서 보면 늘 밝아 보인다. 창밖에서 바라보는 남의 집 등불이 따뜻해 보이는 것처럼. 그러나 그 집 안에도 바람이 들고, 그 방에도 아무도 모르는 그늘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남의 가장 밝은 한 장면과 내 하루 전체를 견주고 있다. 처음부터 공평한 비교가 아니다.
비교가 늘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모습이 마음을 움직이고, 나도 저렇게 살아 보고 싶다는 자극이 되기도 한다. 다만 그 마음이 나를 앞으로 걷게 하는지, 그 자리에 붙잡아 두는지는 구분해 볼 만하다. 걷게 하는 비교는 오늘 할 일 하나로 이어지고, 붙잡아 두는 비교는 한숨으로 끝난다.
그래서 요즘은 화면을 오래 보지 않으려 한다. 대신 오늘 내 앞에 있는 것들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