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아주 편리한 말이 하나 있다. "언젠가."
언젠가 한번 보자, 언젠가 시간 나면 전화할게,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말해야지. 이 말을 하는 순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중으로 옮겨 둔 것이 되니까. 그런데 옮겨 둔 일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쌓인다. 손에 들고 있지 않아도 어깨 어딘가에 얹혀 있는 짐처럼.
미뤄둔 일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끝내 표현하지 못한 마음이 있다. 고마웠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보고 싶었다는 말. 지키지 못한 약속도 있다. 밥 한 끼 먹자던 말, 다음에 꼭 가겠다던 말. 연락해야지 하면서 며칠이 몇 달이 되고, 어느 순간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게 된 사람도 있다. 하나하나는 크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 쉽게 미룬다. 오늘 하지 않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실제로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쌓일 뿐이다.
지나고 나서야 그 무게를 안다. 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 할아버지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있어 드릴걸 하는 마음은 이제 어디에도 건넬 수 없다. "언젠가"가 그렇게 끝나는 일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신정에 만나기로 한 친구가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락이 닿던 친구였다. 새해를 몇 주 앞둔 주말에 안부 겸 다시 연락했는데 답이 없었고, 나는 너무 바쁜 거 아니냐고 한마디 남기고 그대로 넘어갔다. 얼마 뒤 친구의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약속은 있었는데 그날은 오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이어지던 연락이었는데, 왜 더 자주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오래 남았다.
큰일을 치르고 나면 마음이 잠깐 달라진다. 앞으로는 좀 더 잘해야지, 좀 더 챙겨야지. 그 순간의 마음은 진심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면 일상이 그 다짐 위로 덮인다. 어느새 예전과 똑같이 바쁘고, 똑같이 미루고, 똑같이 연락하지 않는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하루가 바쁘고, 막상 하려면 어색하고, 오랜만이라 쑥스럽다. 그러다 오늘도 지나간다. 후회가 큰 것은 내가 무심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 그 일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못 한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는 않았으면 한다.
다만 하나는 마음에 둔다. 언젠가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대개 티가 나지 않는다. 오래 마음에 걸려 있으면서도 급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자꾸 걸리는 이름이 있다면, 그것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쌓인 것 전부가 아니라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 하나만 꺼내 본다. 문자 한 줄, 짧은 통화, 미안하다는 한마디, 고맙다는 한마디. 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 어설픈 채로 건넨다. 서툰 한 줄이 받는 사람에게는 오래 기억되기도 한다.
초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오늘 켜진 불로 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예전에 누군가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 왔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먼저 손을 뻗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