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말 가운데 修身(수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말이 있다.
'닦는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다. 새로 만든다는 말도, 고쳐 쓴다는 말도 아니다. 이미 있는 것에 가려진 모습을 되찾는 일이다. 집에는 아버지의 은수저가 있었다. 쓰지 않고 두면 검게 변했다. 그 검은 빛은 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려진 것이었다. 닦으면 원래의 빛이 다시 드러났다. 나는 이 말이 좋다.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켜져 있는 불이 가려진 것을 걷어 내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닦는 일에는 끝이 없다. 오늘 닦아 놓아도 내일이면 다시 검어진다. 어제 다짐한 것이 오늘 무너지고, 잘 참았던 마음이 어느 날 별것 아닌 일에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그대로일까 싶다. 그러나 다시 검어진다는 것은 닦는 일이 헛되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 매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밥을 하루 먹었다고 다음 날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닦는다고 거창한 것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아침에 세수를 하고 거울 속 얼굴을 한 번 보는 것, 미안한 일에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하기 싫은 일을 오늘 조금이라도 해 두는 것. 그런 작은 손길이 가려진 것을 걷어 낸다. 큰 깨달음은 어쩌다 오지만 이런 손길은 매일 할 수 있다.
닦지 못한 날도 있다. 몸이 무거워 세수하는 것조차 버거운 날이 있고, 마음이 가라앉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닦지 못한 채로 지나가도 괜찮다. 닦지 않았다고 불이 꺼지지는 않는다. 검어진 채로도 그 안의 은은 그대로 있다. 다만 그런 날이 길어지면 손바닥만 한 자리라도 닦아 보는 것이 좋다.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빛이 난다.
맹자는 닦으면서 '기다린다'고 했다. 俟(사), 기다린다는 글자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일까. 죽음일 수도 있고, 어떤 결과일 수도 있고, 그저 다음 날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기다리는 동안 손을 놓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나를 닦는다는 뜻이다. 기다림이 멍하니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이 된다.
오늘 나는 전부를 닦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손이 닿는 한 자리는 닦을 수 있다. 그 자리부터 다시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