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오면서 우리가 정한 것은 하나도 없다. 언제 태어날지, 어떤 집에서 눈을 뜰지, 어떤 얼굴과 목소리를 갖게 될지 누구도 묻지 않았고 우리도 답한 적이 없다. 불은 이미 켜진 채로 내 손에 쥐어졌다. 그 불을 켠 것은 내가 아니라 부모였다.
이 사실이 어떤 날은 억울하게 느껴진다. 왜 나에게 묻지도 않고 이 길을 걷게 했느냐는 마음이다. 힘든 날일수록 그 질문은 커진다.
아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잘못된 점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아들이 "아빠는 왜 나를 태어나게 해서 힘들게 하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원망하는 마음이 들 수 있지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태어난 것을 기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원망의 마음이 클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거기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불을 처음 켠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은 마음도, 감사하고 싶은 마음도, 결국 같은 곳에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반대편에도 서 있다. 내 아이들도 내가 켠 불로 세상에 왔다. 그 아이들도 원해서 온 것이 아니고, 나는 그것을 묻지 못했다. 이 사실을 정면으로 보면 부모라는 자리가 무겁게 느껴진다. 선택하지 못한 채 시작한 삶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에게 건넨 셈이니까. 그렇다고 그 불을 켠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불을 켜 주는 것만으로 부모의 일이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바람이 불 때 손으로 감싸 주고, 아이가 자기 불을 스스로 들 수 있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일이 남아 있다.
힘든 날도 있지만 좋은 날도 있다. 아이의 작은 웃음 하나에 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벅찰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이 불을 켜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맹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殀壽不貳(요수불이), 修身以俟之(수신이사지). 일찍 죽든 오래 살든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으며 기다린다는 뜻이다. 수명은 내가 정할 수 없으니 마음 쓰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불을 켜 준 사람은 따로 있어도, 그 불은 든 사람의 것이다. 나는 내 불을, 아이들은 아이들의 불을 들고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