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릴 권리
"우리 바캉스 가서 뭐 할까?"
나의 물음에 남편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진정한 바캉스란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뭐라??"
'어딘가로 휴가를 떠난다는 것은 어떤 장소를 새롭게 방문하거나 경험하는 것이지, 정말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지 왜 바캉스씩이나 떠나야 한다는 것일까?'
휴가에 대한 나와 남편의 다른 생각은 바캉스 때마다 충돌했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워 움직이게 하기가 힘들었고, 그는 나에게 이끌려 장단 맞춰주느라 힘들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게으를 권리,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
내가 세상에 태어나 들었던 말 중 제일 어이없고 불경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이 어이없는 말이 프랑스 슬롯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라면 어떨까?
19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폴 라파르그는 이미 1880년에 '게으를 수 있는 권리(Le Droit à la paresse)'를 주창했다. 모두가 노동의 신성함만을 외치던 산업혁명 한복판에서 "하루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예술, 학문, 휴식을 누려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이는 프랑스 노동운동과 쉬는 권리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당시 휴가는 당연히 귀족이나 부르주아만의 특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지중해 문화권(이탈리아의 ‘Dolce far niente’, 프랑스의 ‘Farniente’)에서 유래했다.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강요하는 현대 슬롯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이 확장되면서, 휴가 중에 뭔가 알차게 체험하거나 관광지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거나, 나무 그늘 아래서 바카라을 읽다 잠드는 등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에 죄바카라감을 느끼지 않을 권리. 어쩐지 남프랑스 지중해변의 삶이 그토록 널널하고 유유자적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인들에게 바캉스란 단순히 다음 일을 위해 충전하는 '휴식'이 아니다.
온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는 삶의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아이들은 학교 철학 시간에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다루며 자란다. 어릴 때부터 '휴식과 여가는 인간의 당연한 존엄'이라는 생각 속에서 자라니, 어른이 되어 여름 한 달간 가게 문을 닫고 바캉스를 떠나는 것이 이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삶의 질서 같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8월의 파리는 텅 빈다. 관광객들만 있을 뿐, 많은 식당과 가게가 긴 휴업을 한다. 8월에 오는 관광객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로 가득 찬 텅 빈 파리일 가능성이 많다.
바캉스 기간에 프랑스 사람들은 휴양지나 새로운 나라로 떠나기도 하지만, 휴가 때마다 같은 곳(별장, 매년 같은 캠핑장 등)에 가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다 오기도 한다. 친구나 친척들이 휴가를 떠난 사이 일상에서 멀어진 그 집에서 머물다 오기도 한다.
아침에 느긋이 일어나 해가 쬐는 테라스에서 커피와 크루아상을 즐기고, 바카라을 읽다가 낮잠을 자고, 근처 전통시장에 들르거나 친구나 가족을 만나기도 한다. 잘 자고 잘 먹고 무탈하고 소박한 일상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다. 식사는 각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거나 사 먹거나, 하고 싶은 사람이 돌아가며 한다.
우리 가족이 바캉스로 캠핑을 떠나기 전, 시어머니가 내게 신신당부하셨던 기억이 난다.
"바게트랑 햄이랑 던져주고 알아서들 먹으라 하고, 너는 요리의 요자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그러나 먹는 것이 중요한 한국 사람이라서 그 당부는 지키기 어려운 것이 되곤 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휴가 형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떠나는 곳의 주요 관광지를 미리 체크하고 계획을 짜곤 했다. 내 머릿속은 휴가 기간에도 업무 처리하듯 계획이란 게 있었고, 나의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to do’ 모드였다. 쉬는 와중에도 피곤했다.
20여 년이 넘은 지금, 이제야 그 당시의 내가 보인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아무것도 안 하는 모드로 바뀌었다. 처음엔 사실 죄바카라감, 또는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낸다는 불안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휴가란 충분히 멍 때리다 와야 한다는 프랑스 사람들처럼 변했다.
프랑스는 현재 최소 연 5주(근무일 기준 25일)의 유급휴가가 보장되어 있고, 법정 노동시간은 주당 35시간이다. 이런 철학적·슬롯적 합의 아래 유급휴가는 단계적으로 늘어났다. 1936년 2주에서 시작해 1956년 3주, 1969년 4주, 1982년 미테랑 정부에서 5주가 되었다.
또한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자는 취지로 1998년 주 35시간제 법안이 통과되어 2000년부터 시행되었다. 7월과 8월이 되면 남부로 가는 고속도로가 피서객 차량으로 마비되는 '그랑 데파르(Grand Départ, 대이동)'라는 독특한 슬롯적 현상이 고착화되었다. 휴가를 7월에 가는지 8월에 가는지에 따라 7월 파(Juilletistes)와 8월 파(Aoûtiens)로 이름까지 생겼다.
그렇다면 일 안 하고 이렇게 계속 놀면 경제는 어떻게 돌아갈까?
실제로 8월 한 달간 공장이나 사무실이 문을 닫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일하는 약국도 8월이 되면 매대가 텅 빈다. 손님은 있는데 물건이 없다. 매해 반복되는 문제(나만 문제라고 생각함)다.
프랑스 관광 소비의 약 3분의 2는 프랑스인 자신들이 만든다. 7월, 8월 바캉스 시즌 동안 관광, 숙박, 외식, 문화 산업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는 국가 경제의 거대한 축을 담당한다.
이곳 사람들에게 휴가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1년간 노동하는 가장 큰 동기이기도 하다.
즉, 잘 쉬어야 제대로 소비하고, 그래야 내수 경제가 돌아간다는 논리다. 쉬는 시간이 곧 소비의 시간이니, 프랑스 슬롯는 '쉼'을 비용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의 일부로 설계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요즘 프랑스 경제가 어려워지고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거의 40퍼센트가 휴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뉴스에서 심각하게 얘기하곤 한다.
(솔직히 나는 뉴스에서 경제가 어렵고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을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통계 수치로 인식하고자 하는 프랑스가 처음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신기하다. 이것만큼은 아직 적응을 못 하겠다.)
쉬는 법에 대한 이 극명한 관점의 차이는, 그들이 일터에서 일하는 방식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자.'
한국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주인의식'
이 얼마나 멋지고 숭고한 말인가?
그런데 문득 질문을 던지게 된다.
주인? 무엇의 주인?
회사의 주인? 나 자신의 주인?
회사에서 나에게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라고 할 때는, 회사가 내 것인 양 사장님 마인드로 일하라는 것일 테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 사람들, 즉 나를 포함해서 대체로 그렇게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내가 한국을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요즘 젊은 세대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일까지, 여러모로 이리저리 협력하며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물론 한국 기업 내에서도 자신이 맡은 미션과 업무 영역이 확실히 갈라져 있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건건이 생기는 특수한 경우나 업무 과정에서의 유연성 등, 갈라놓고 정해놓은 미션만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나의 주인이 되어서, 즉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머리를 멀티로 돌려가며 물심양면으로 하는 것, 이것이 일하는 사람의 당연한 도리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슬롯가 한국이다.
이곳 프랑스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라'라고 하면 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아마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 자체를 못 할 것이다.
"뭐라고? 무슨 의식이라고? 주인의식? 내가 이 회사의 주인? 나는 주인이 아닌데 어떻게 주인의식을 갖는다는 말인가요?"
그것은 마치 당신이 하지 않아도 될 일들과 생각들을 공짜로 해달라는 얘기와 다름없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에게 노동이란 '주인의식'이라는 거창하고 모호한 도덕적 강박이 아니라, 내가 계약한 노동력과 시간의 교환일 뿐이다. 그래서 일하는 시간 동안 커피를 마신다든지 개인 업무나 개인 전화를 받는 일도 드물고, 퇴근 시간이 되면 칼같이 나가버린다. 그것에 대한 어떠한 갈등도 없다.(물론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일반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임)
처음 프랑스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한국에서 하던 대로 일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찾아서 했고, 약국을 위해 휴가도 가장 바쁘지 않은 시즌으로 골라 신청했다. 사장은 싱글벙글 좋아했지만, 프랑스인 동료들의 반응은 떨떠름했고 그들의 시선은 점차 내게 차가워졌다. 나는 아파도 일을 하러 나갔지만 동료들은 병가를 자유롭게 냈고, 사장도 결원에 대한 어떠한 스트레스도 없어 보였다. 휴가도 내가 알아서 손님이 가장 없는 시즌에 가려고 했고, 최대한 약국을 생각했다. 그야말로 주인의식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약국에 파견 나오는 한국인 동료들도 일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잘한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일을 더 많이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값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끼리 경쟁이 심해지는 이 악순환, 과연 누가 만드는 것일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악순환이 결코 한국 노동자에게 친절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만든 높은 잣대는 프랑스 동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아시아 노동자들끼리 점점 더 치열해진다. 노동자는 스스로 기준을 낮춰 받아들이는 대신 더 많이 일하게 되고, 사용자는 기준이 계속 높아지니 편하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하향 평준화, 사용자 입장에서는 상향 평준화가 되는 셈이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전제로 한다.)
한국 사람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프랑스의 그것이 극과 극인 것만은 확실하다.
인식의 차이가 모든 것의 차이로 이어진다.
"한국 사람들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 아들에게 아버지가 일뿐이었던 자신의 삶을 그대로 연결시켜주고 싶어서 치열하게 교육시키는 것 같아."
잠시 한국 학생 과외를 했던 남편의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우리의 삶과 일과 휴식,
어떻게 공존하고 어떻게 인식할지 프랑스를 통해 다시 한번 쉬어감의 미학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