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왜 파업을 밥 먹듯 자주
할까?

생필품같은 느낌

by파리이방인

“저렇게 파업을 하면 도대체 얼마나 나라 경제에 타격이 되겠어?”


철도, 항공, 선박까지 옴팡지게 파업을 하는 꼴을 보며 괜히 심란해진 마음에 나는 티브이를 보며 한마디 했다.

그런 나를 남편이 힐끗 보며 신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니까 저렇게 경제적 타격이 있는 걸 알면 빨리 말을 들어줘야지. 그만큼 경제적으로 저들이 기여를 하고 있다는 방증이잖아?”


“뭐라?”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국에선 파업노동자들에게 몇백억 원 손해배상 청구까지 할 수 있는 마당에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뭔가 억울했는데 뭐가 억울한지는 나도 몰랐다.

생각해 보면 내가 뭐 사장님이나 대통령도 아닌데 나라경제가 타격받는 것, 그것도 프랑스 경제가 타격받는 것까지 맘이 심란하다는 게 일단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걸 너무 한국적이라고 하는 걸까?

이제는 프랑스에서 파업 뉴스가 없으면 오히려 슬롯가 제대로 안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현재 프랑스는 고등학교 시위로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물론 고등학교 시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들은 곧 슬롯에 나갈 준슬롯인으로서 가장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다.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서 항상 목소리를 내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내는 도구가 파업이다.

(프랑스에서는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학교를 막는 것도 '파업(grève)'이라 부른다.)

고등학생 대표는 유수의 메인뉴스에 초대되어 각 전문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토론한다.

그런 고등학생 대표를 티브이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너무 낯설어서 현실적이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진지하게 토론하며 고등학생 대표의 의견을 듣는 출연자들의 모습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고등학생 대표는 논리에서 밀리는 법이 없었고 비록 비현실적인 면이 있을지라도 그들의 젊음과 더불어 더 명쾌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2026년 현재, 마크롱 정부 9년 차에 접어들며 지속된 교육 및 공공부문 예산 긴축기조에 급기야 올해 고등학생들이 파업으로 불만을 분출한 것이다. 현재 이 파업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기간도 길어짐에 따라 그 향방이 어디로 갈지 예의주시된다.



'파업은 나의 권리이다.'

'시위도 나의 권리이다.'


나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나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꼭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

즉, 이들에겐 파업인 것이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생각이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걸까?

프랑스는 헌법전문에 파업권이 명시되어 있을 만큼 하나의 기본권리로 보호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파업은 참다 참다 최후에 터져 나오는 민중봉기 성격뿐 아니라 협상 절차의 일부이자 기본적인 권리인 것이다.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노트에서 파업의 권리를 배우고 그 파업이 슬롯전반과 실제 정치적 결실까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배우는 내용을 발견했을 때의 참신함을 잊을 수가 없다.)

따라서 공무원, 선생님, 공공기관, 국립병원 종사자까지도 파업을 할 권리가 있다.

실제로 공공부문이 파업으로 멈추면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자주 연대하고 파업한다.

하나의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이자 권리인 만큼 주기적인 파업을 통해 정부의 예산 삭감이나 급여 문제 등에 대해 이슈를 선점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예산 삭감이나 임금동결 따위의 현안들이 정부의 정바카라으로 결정되기 전에 미리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은 이미 결정되고 나서 그 불만이 폭발하듯 파업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곳은 법제과정에서 그럴 기미가 조금만 보여도 파업을 한다.

왜냐하면 이미 법적으로 통과가 된 법안이라면 그것을 되돌리기는 훨씬 어렵거나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다.

이미 혁명의 성공이 집단적으로 각인된 슬롯, 그 기억은 슬롯전체의 성격을 다르게 만든다.

프랑스는 국민전체가 파업과 시위가 생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다.

성공의 기억은 이렇게 슬롯를 다르게 만든다.

마치 우리의 1987년의 기억이 우리 슬롯를 이끄는 것처럼.


프랑스사람들에게 있어 파업이란 자연스러운 적극적인 의사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은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선조들이 뼈를 깎는듯한 고통을 이기며 투쟁으로 일궈 놓은 결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파업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들을 묵묵히 감수한다.

내일의 내가 다시 거리로 나설 일이 있을 것이기에 오늘의 나는 그들을 맘속으로 연대하며 지하철이 없어도 버스가 없어도 묵묵히 견디는 것이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로 간주한다.

남의 식구일이 아니라 내 가족의 일로 간주한다.

나의 친구, 나의 이웃의 일로 간주한다.

이 테두리 안에는 프랑스에서 살고 일하는 노동자 모두가 포함된다.


프랑스는 노조 가입률은 낮지만, 프랑스만의 특이한 제도가 있다.

산별 노조가 타결한 협약은 해당 분야 전체 노동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일한 지 15년이 되었지만 솔직히 파업이나 시위에 동참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숱한 권리를 알게 되는 것은 달라진 삶의 경이로움이었다.

어차피 그들이 이겨야 나도 이긴다.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자의 권리는 프랑스 고용주들이 착해서 또는 교양이 높아서 또는 인성이 좋아서 알아서 해준 것들이 아니다.

프랑스는 이러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긴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프랑스의 이러한 연대의식이 도전받고 있다.

프랑스도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파업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에 부딪혔다.

또한 점점 강경해지고 잦아지는 파업으로 나라 전체의 피로도가 누적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최대노조를 가진 철도의 경우, 다른 업계의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처우를 받는다는 시선이 있는데, 그들의 반복되는 잦은 파업으로 메트로와 기차에서 불편을 견뎌야 하는 보통의 월급쟁이들 사이에는 분노하는 여론도 없지 않다. 그리고 그 틈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회의감에 휩싸인다. 파업을 해도 얼마만큼 달라질까?

이러한 연대가 얼마큼 지속될 수 있을까?

지속되지 못한다면 이 사람들은 어떤 대안들을 찾아낼까?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여전히 이방인인 내게 간간히 드는 상념이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