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서막
● 3일 휴무다.
집에 콕 박혀 있다 이틀을 머리 안 감고 넷플릭스만 보다가, 배가 고파서 슬리퍼 신고 슈퍼에 갔는데 하필 그날 전남자친구를 마주쳤다.
● 점심시간에 김밥 집에서 혼자 밥 먹고 있는 모습을 들켰다.
전에 온라인 게임에서 껄끄럽게 지냈던 사람인데
난 그때 백수였는데
● 마지막 근무 날, 오늘만 하면 퇴사, 탈출이다 ~
6시 땡 하면 가방 들고 탁. 일어나
무표정으로 수고하셨습니다~를 뱉은 뒤
'또각또각' 소리 내며 시크하게
마지막 복도를 빠져나오리.
현실은 바카라상 위 프린트물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무거운 받침대를 낑낑대면서 옮기다 뒤뚱대는 엉덩이를 들키고야 만다.
안 그랬으면 하는 날 꼭 그렇게 되는 날이 있다.
이건 정말 아니었으면 했는데, 꼭 그 일이 현실이 된다.
이 머피의 법칙은 신의 계획인가, 우연인가
" 태고야, 할머니 돌아가셨다. "
출근 직후, 엄마의 전화에 놀라서 손이 떨렸다.
그대로 얼은 나는 업무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전화를 엿들은 옆자리 동료가 위로를 건넸다.
나도 가족이 처음 돌아가셨을 땐 정말 놀랬어. 충격이 크더라고. 오늘은 조기 퇴근 하고 얼른 가봐, 태고야
상황을 눈치챈 팀장님이 위에 실장님에게 가 사실을 알렸다.
" 외할머니? 엄마의 엄마잖아.
뭐 어렸을 때부터 키웠데? 아니지.
회사에서 해줄 건 없어. "
회사 동료들끼리 눈이 마주쳤다. 지금 할머니 돌아가셨다는데 저렇게 말한 거야?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얕게 깔렸다.
실장님이 갑자기 내 자리로 왔다. 살며시 손을 잡았다.
" 어쩌니 태고야. 많이 놀랐지.. "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일은 무슨 일이야 오늘은 얼른 가봐야지.. 얼른 가서 어머니 봐드려.. 얼마나 놀랬니..'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실장님이 나를 꼭- 안았다.
그녀를 동경한 이유는 명확했다.
업무 강의를 정말 잘했고, 카리스마 있었고
여자가 봐도 섹시한 느낌이 있었다.
말을 화려하고 유창하게 했으며, 유쾌한데 유머까지 있어서 사람을 홀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아침 조회 후엔 모두가 그녀의 매력에 반했다.
그리고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마치고 둘이 한잔할까?, 둘이요?
응, 삼겹살에 소주. 오늘 같이 힘든 날은 삼소 하고 싶어, 태고랑. 그래요 그럼
주말에 만나자. 주말에요? 좋은 공원이 있는데 지금 날씨에 딱 좋아. 너랑 같이 바람 쐬고 싶어.
그녀는 요즘 말로 플러팅 하듯 한 번씩 데이트신청을 했고
회사 메신저로 내 진짜 짝꿍은 너라며 달콤한 말도 건넸다.
다시 태어나면 너처럼 살고 싶어. 뭐 마음대로요? 아니. 넌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잖아. 그게 부러워, 닮고 싶어.
공원 앞 칼국수 집에선 같이 낮술을 마시다, 갑자기 전 남자친구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그땐 내가 이기적이였던 거 같아.. 그땐 성공이 먼저였거든. 헤어질 때가 되니까 나한테 온갖 말을 퍼붓더라. 정말 상처받았지. 그 사람도 오래 나를 기다렸거든..
내가 휴지를 건넸다.
회사에서 저렇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 그것도 나보다 높은 상사가. 여덟 살 어린 내 앞에서 전 애인 이야기를 하며 우는 모습을 보니 이 사람 나한테 진심이구나, 나를 어린애로만 보지는 않나 보다 하는 생각에 괜히 뿌듯해졌다.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나도 어느 순간 부터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다. 가끔 연극 공연도 함께 보고, 퇴근 후 맥주도 한잔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사이 그녀는 지점장으로 승진했다.
1년 뒤,
그녀는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했다.
가볍게 배낭여행처럼 주말에 다녀오기로 했다.
" 옷 사러 가자. 롯데백화점 가서 쫙- 빼입고, 우리 미모로 제주도를 찢어놔야지. !! "
그녀는 들떠있었다.
사실 여행 경비로 빼놓은 돈이 2박 3일 보내기에도 넉넉한 금액은 아니었다.
추가로 옷을 산다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부산에서 제주도는 요즘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였고,
나는 옷도 대부분 인터넷으로 사 입는 편이라, 비싼 옷을 사야 한다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옷은 있는 것 중에 입고 갈게요 실장님. 사는 건 조금 부담돼서.. ㅎㅎ
3.4일에 한번은 오던 연락이 일주일이 넘게 없었다.
화났나?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다.
대답도 없는데 계속 보내기도 그렇고, 어느새 여행 전날이 되었다.
내일 여행을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전화를 걸었다.
짐 다 챙겼어요? 아침 8시 출발이니까, 오전에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모닝콜 해줄까요?
모닝콜? 각자 오자. 각자
차가웠다. 무안했다.
- 2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