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을 잘 보내지 못하는 편이다.
끝난 일도 한 번 더 생각하고,
지나간 말도 한참 뒤에 다시 꺼내 본다.
상대는 이미 잊었을지도 모르는 장면을
나는 혼자 몇 번씩 되감는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조금 다르게 행동했다면 달라졌을까.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감정은 자꾸 현재형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한동안은
감정을 없애는 방법을 찾았다.
괜찮은 척하기.
바쁘게 지내기.
생각하지 않기.
더 좋은 일을 만들기.
그런데 이상했다.
밀어낼수록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다시 나타났다.
잠들기 직전,
버스 창밖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비슷한 말을 했을 때.
감정이라는 건
문을 닫는다고 밖으로 나가주는 손님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없애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한번 제대로 바라보면 어떨까.
왜 왔는지 묻고,
어디에 머물렀는지 보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
그 과정에서 그림을 그렸다.
어떤 날의 나는 방전된 배터리처럼 누워 있었고,
어떤 날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빗자루로 쓸어도 남는 먼지처럼 느껴졌다.
넘어진 펭귄을 그리기도 했고,
유리 너머에서 서로 닿지 못하는 마음을 그리기도 했다.
조금 우스운 그림도 있고,
조금 서글픈 그림도 있다.
그런데 여러 장을 늘어놓고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내가 지나온 감정들이었다.
한때는 아주 중요했고,
당시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결국은 조금씩 멀어진 것들.
그걸 보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
감정도 머물다 가는구나.
사람처럼.
계절처럼.
그래서 이번에는
그림을 벽에 걸어두는 것만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보는 사람도 자기 마음을
잠깐 꺼내놓을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시장 한쪽에는 이런 질문을 두었다.
오늘 두고 가고 싶은 감정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하나를 더 물었다.
대신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가요?
누군가는 불안을 두고 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미련을 적을 수도 있다.
짜증,
걱정,
외로움,
미안함 같은 단어가 적힐지도 모른다.
반대로 용기나 여유,
무심함이나 설렘을 가져가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답들을 알 수 없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사람들이 전시장 안에서
잠깐이라도 자기 마음을 생각했으면 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다른 사람의 표정을 읽고,
다른 사람의 말을 해석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한다.
그러면서 정작
‘나는 지금 어떤 마음이지?’
라는 질문은 잘 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는 어쩌면
그 질문 하나를 위해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물다 간 감정들〉.
처음 제목을 정했을 때는
내가 지나온 감정을 이야기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시를 준비할수록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이곳을 다녀갈 사람들의 감정도
잠깐 이곳에 머물다 갔으면 좋겠다고.
꼭 작품을 오래 보지 않아도 된다.
설명을 전부 읽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적지 않아도 된다.
그저 어느 그림 앞에서 잠깐 멈추거나,
말랑한 것을 한번 만져보거나,
질문 하나를 마음속에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 마음 하나쯤 발견한다면 좋겠다.
아직 보내지 못한 감정이 있다면
조금 더 가지고 있어도 괜찮고,
이제 충분히 바라봤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보내줘도 괜찮다.
감정에도
퇴장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머물다 간 감정들〉
슈펭 이혜정 개인전
2026년 9월 15일 — 9월 29일
이천시청소년생활문화센터 인재육성동 3층
무료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