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봄날』을 읽고

지나온 시간은 마음속에서 다시 피어난다

by수련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온라인카지노라는 공간에서 서로의 글을 읽으며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마음이 가까웠던 작가의 출간 소식에 더 반가웠고 응원하고 싶었다. 집 앞 도서관에 희망 도서로 신청해 두었던 바카라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은 날, 마치 기다리던 선물을 받은 듯 바카라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김정희 작가의 『거기, 봄날』이었다. 바카라장을 펼치기도 전에 분홍빛 복숭아가 그려진 표지가 따뜻하게 다가왔다.


『거기, 봄날』을 읽고 어린 시절의 풍경, 이름조차 모르고 지나쳤던 식물, 오랫동안 곁을 지켜온 바카라상까지.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사물과 풍경에 다시 눈길이 머물렀다. 이 바카라은 지나간 시간 속에 묻어둔 기억들에게 다시 이름을 불러주는 바카라인지도 모르겠다.


온라인카지노에서 ‘호랑’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김정희 작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거기, 봄날』에는 살아오며 만난 사람과 사물, 계절과 자연의 풍경이 글과 그림으로 담겨 있다. 글은 담백하고 정갈하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문장 사이에는 삶의 깊이가 배어 있다. 여기에 섬세한 그림이 더해져 글로 다 표현하지 않은 마음까지 색으로 전해진다.


특히 마음에 오래 남은 글은 ‘식물 채집’이다. (P.95)

여름방학이면 작가는 동생들과 들과 밭으로 나가 식물을 채집하고, 아버지는 잘 말린 식물을 종이에 붙여 이름을 쓰도록 했고 직접 표지를 꾸미고 묶어 식물도감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산골에서 중학교 때까지 살았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이면 동생들과 매미채를 들고 다니며 잠자리와 매미를 잡았고, 씀바귀와 명아주 같은 풀을 찾아 식물 채집도 했다. 씻고 말린 식물을 종이에 붙이고 이름을 적으며 곤충표본과 작은 식물도감을 만들었다. 그때는 방학 숙제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자연이 내게 가르쳐준 첫 번째 공부였다. 어린 시절 익힌 식물의 이름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다. 도시에서 자란 지인들과 시골에 가면 나는 어느새 ‘식물 박사’로 불린다. 자연은 바카라으로 외운 지식보다 몸으로 익힌 기억을 오래 남기는 것 같다.


'몬스테라'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작가의 글을 읽고서야 카페나 사무실에서 흔히 보던 넓은 초록 잎과 갈라진 모양에 눈길이 갔다. 몬스테라의 잎이 갈라짐은 햇빛을 잎 아래까지 들이고 강한 바람을 견디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라고 한다. 작가는 그 갈라진 잎에서 자신의 결핍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가 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지혜일 수도 있다. 비어 있는 곳으로 빛이 들어오고 바람이 빠져나간다. 사람도 상처와 빈자리 덕분에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빛을 받아들이고 바람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닐까.


또 하나 오래 마음에 남은 이야기는 ‘눈치꾸러기 바카라상이 오기까지’이다. (P.57)

작가는 남편이 만들어준 투박한 나무 바카라상을 처음에는 마땅치 않게 여겼지만, 십오륙 년을 함께한 뒤 그 바카라상에서 따뜻한 빛을 발견한다.

그 글을 읽으며 내 서재의 바카라상이 겹쳐 보인다.

내게도 삼십 년 가까이 된 바카라상이 있다. 아들이 중학교 1학년 때 사용하던 바카라상이다. 이사할 때마다 버릴까 생각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서랍을 열면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앨범과 공부했던 옛날 노트가 나온다. 사진 속 어린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바카라상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며 내가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 기뻤던 날과 마음이 가라앉았던 날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미련 때문만은 아니다. 그 물건과 함께한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 봄날』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흐름 속에 사람과 자연, 가족과 사물의 이야기를 담았다.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해서 지나치기 쉬운 순간들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바카라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작가의 기억이 나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향토색 짙은 전라도 사투리와 글에 기대어 있는 그림은 그 기억에 따뜻한 온기를 더한다.


유년의 서정적 풍경이 그리운 사람에게,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자연의 바람을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이 바카라을 권하고 싶다. 바카라장을 덮은 뒤에도 나는 한동안 서재의 오래된 바카라상을 바라보았다. 봄날은 지나가 버린 계절이 아니라,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도 문득 돌아갈 수 있는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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