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몫의 가을

청설모가 놓고 간 밤송이

by수련

한여름 내내 지붕처럼 숲을 덮고 있던 열기가 조금씩 걷히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며든다. 나뭇잎들은 어느새 누리끼리한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계절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손님처럼 어느 날 문득 우리 곁에 와 있다. 숲 속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툭. 투득. 툭.

바람 한 점 없어 흔들리지도 않던 밤나무 가지에서 아람이 벌어져 떨어져 내린다. 수분이 빠진 갈색의 가시 갑옷이 저절로 벌어지며, 속에 감춰두었던 알밤을 내놓는다. 숲은 아무 말없이 가을을 풀어놓고 있었다.


발밑에는 동글동글한 도토리가 흩어져 있었다. 마른 낙엽 사이에 몸을 숨긴 것도 있고,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반쯤 얼굴을 내민 것도 있었다. 햇빛을 머금은 알밤은 갈색 유리처럼 반짝였다. 벌어진 밤송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가시 사이를 조심스럽게 벌렸다. 까칠한 가시가 손끝을 위협했지만, 쉽사리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알밤은 서로 몸을 맞댄 채 햇살을 받아 윤기가 흘렀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따뜻했다. 여름의 햇볕을 오래 품었던 탓일까. 아니면 나무가 마지막 온기를 열매 속에 감춰둔 것일까.


간밤에 비가 내려서인지 숲길에는 검은 봉지를 든 할머니 두 분이 먼저 와 계셨다. 두 분은 허리를 굽혀 도토리를 하나씩 주워 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해오던 일이라 눈에 보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했다. 두 분은 줍는 재미로 필요한 만큼 채우자 봉지 입구를 오므리고 일어섰다.


산바카라은 어느새 운동이 아니라 알밤을 줍는 일이 되었다. 운동복 주머니가 불룩해질수록 발걸음은 느려졌다. 계절이 길 위에 흘려놓은 작은 보물을 하나씩 거두는 일이 즐거웠다. 산길을 한 바퀴 돌고 두 번째 접어들었을 때였다. 청설모 한 마리가 밤송이 하나를 입에 물고 달린다. 제 얼굴보다 더 큰 실한 밤송이였다. 녀석은 나를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길 가운데 그것을 툭 내려놓았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지? 산바카라길에 가끔 마주치면 바라보며 '안녕'하며 혼자 인사를 나누던 사이다.


청설모는 나무줄기에 매달린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잠시 내 눈과 마주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나무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풍성한 꼬리를 세우고 나뭇가지 사이를 가볍게 건넜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다시 저 나무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한동안 나는 길 한가운데 놓인 밤송이를 바라보았다.

물고 가다가 놓친 것일까. 아니면 친구라고 내게 준 것일까. 나는 밤송이를 두 발로 밟아 고정하고 조심스럽게 벌렸다. 통통한 알밤 세 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손에 쥔 채 숲 속으로 던져야 할지. 그냥 가져가도 될지 한참을 망설였다.


아까 보았던 할머니들의 검은 봉지가 떠올랐다. 숲에서 떨어지는 열매마다 저마다의 몫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도, 다람쥐에게도, 청설모에게도. 그리고 땅에도. 내년의 봄을 위해 흙 속에 남겨둘 씨앗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나무는 열매를 움켜쥐지 않는다. 때가 되면 제 몸에서 떼어내 모두 내려놓는다.


밤나무 아래 저절로 떨어져 있는 아람을 모두 줍지는 않았다. 몇 개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뒤에 산바카라하는 누군가도 눈을 반짝이며 가을의 풍요를 만나는 기쁨을 누려야 할 테니까. 발밑의 도토리 몇 알은 주워 숲 안쪽으로 던졌다.

톡. 톡.

낙엽 위로 떨어지는 작은 열매가 청설모 친구에게 건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씨앗이 산속 친구들의 겨울 양식이 될지, 흙 속에서 긴 겨울을 견뎌 한 그루의 나무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숲은 알 수 없는 것들을 넉넉히 품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한참을 걷다가 길 위에 밤송이가 널려있는 숲길을 지났다. 아름이 벌어진 밤송이 사이로 알밤 하나가 마른 낙엽 위로 굴러 나와 있고, 다른 하나는 가시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젖은 낙엽에서 달큼하고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바스락.

잠시 뒤 밤의 보늬가 바람을 타고 내려와 내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너도 네 몫의 가을을 먹고 있구나.'

나무 위의 청설모는 풍성한 꼬리를 한 번 흔들고 다시 밤을 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이 숲의 오랜 주인처럼 의젓해 보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미는 햇살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계절이 건네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가을의 풍성함은 많이 갖는 것보다 누군가를 위해 조금 남겨두는 것, 그리고 내가 받은 작은 마음 하나를 오래 기억했다가 다시 건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머니 속 그 세 톨의 밤을 가만히 더듬어 본다. 매끈하고 단단하다. 맑은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다. 멀리서 청설모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숲 속으로 사라진다. 밤을 꺼내 숲 속으로 돌려주고 두 손은 가볍게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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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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