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가을을 맛보다
지난 주말, 딸과 함께 사찰음식 대향연이 열린 봉녕사를 찾았다. 나란히 걷는 딸의 발걸음에 맞춰 산사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인데도 경내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그 위로 솔숲을 건너온 바람이 솔잎 향을 실어 날랐다. 고개를 들자, 가을 하늘 아래 우화당 팔작지붕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잠시 걸음을 늦추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올해로 열여섯 번째를 맞은 사찰음식 대향연의 주제는 ‘일상의 식탁에서 만나는 사찰음식’이었다. 육화당에는 ‘가을, 산사의 식탁’이라는 이름으로 차려진 음식들이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오색 가을 채소 한 상’에는 계절의 빛깔이 담겨 있었다. 화려하게 꾸미기보다 재료가 지닌 모양과 색을 살린 상차림이었다. 그릇마다 여백이 넉넉해 채소의 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먹는 일에도 이토록 차분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가만히 스쳤다.
선재 스님의 ‘콩 한 알에 담긴 우주’ 전시도 눈길을 끌었다. 작은 콩 한 알이 밥상에 오르기까지는 햇빛과 바람, 비와 흙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음식을 완성된 모양으로 마주하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수고와 기다림이 들어 있다. 한 끼를 먹는다는 것은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겠다.
나는 재료 본연의 맛을 좋아한다. 어릴 적 어머니는 텃밭에서 따온 채소를 무쳐 밥상에 올리곤 하셨다. 양념은 많지 않았지만, 채소마다 제맛이 살아 있었다. 그때는 그 소박함이 특별한 줄 몰랐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꾸밈없는 음식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 년 전, 도반들과 함께 음식명장 선재 스님에게 사찰음식을 배운 적이 있다. 재료를 귀하게 다루는 손길과 직접 담근 장류의 양념을 더하는 순서, 맛을 서두르지 않고 살피는 태도가 그때 몸에 익었다. 음식은 솜씨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재료를 대하는 마음과 만드는 사람의 시간이 함께 들어가야 했다. 그 기억이 있어서일까, 이번 시연도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유화 스님은 가지 초밥을 만들어 보였다. 어슷하게 썬 가지를 기름 없이 구워 다시마 식초와 조청, 조선간장을 같은 비율로 섞은 양념장에 재웠다. 찬밥에 단촛물을 입히고 들깨와 참기름으로 향을 낸 밥을 뭉쳐 겨자를 살짝 바르고 구운 가지를 얹자 소박한 초밥이 완성되었다. 여름에는 오이를 사용해도 상큼하고 특별한 맛이라고 했다.
한입 베어 물자 가지의 부드러운 식감이 먼저 느껴졌다. 새콤달콤하고 짭조름한 맛 뒤로 들깨의 톡톡 터지는 고소함이 밀려왔고, 마지막으로 겨자의 알싸함이 입안을 말끔히 쓸고 지나갔다. 가지는 나물과 구이로만 먹었는데 이런 고급진 맛이 있었다니. 옆에서 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맛을 음미하더니 담백하고 정갈해서 좋다고 했다. 같은 음식을 앞에 두고 맛을 나누는 일은 별것 아닌 듯해도 마음에 오래 남는다.
점심때가 되자 천막 아래에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도 비빔밥 한 그릇씩을 받아 들었다. 고사리와 콩나물, 버섯, 무생채가 밥 위에 얹혀 있었고 고추장이 곁들여져 있었다. 함께 나온 물김치에는 양배추와 오이, 무가 들어 있었다. 여러 재료가 한 그릇 안에서 어우러졌지만 어느 하나 지나치게 나서지 않았다.
식사 뒤에는 연꽃차와 다식을 맛보았다. 은은한 연꽃향을 음미하며 잠시 쉬는 동안 경내의 소란도 멀게 느껴졌다. 어디론가 서둘러 가거나 무언가를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 하루가 충분히 행복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수수부꾸미와 청국장, 수제 치즈 같은 것을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중 수수부꾸미를 보자 어린 시절 시골 장터가 떠올랐다. 장날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장터를 돌았다. 기름 냄새와 김이 뒤섞인 골목 어디선가 익숙한 음식 냄새가 풍겨 왔고, 걸음마다 어머니 손의 온기가 따라왔다. 오래 전의 풍경은 사라졌어도, 쫀득한 부꾸미를 입에 넣자, 그 손의 온기가 먼저 되살아났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기억에 남은 것은 특별한 음식만이 아니었다. 솔숲을 지나던 바람과 가지 초밥의 낯선 맛, 딸과 마주 앉아 먹던 비빔밥, 장터의 기억을 되살린 수수부꾸미까지. 서로 다른 순간들이 한 끼의 식탁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사찰음식은 원물의 맛을 살리는 음식이면서, 먹는 사람에게도 잠시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는 듯했다. 더 많이 넣고 더 강하게 만들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맛을 살피는 일. 어쩌면 일상에도 그런 태도가 필요할지 모른다. 무언가를 더하기 전에 이미 곁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 말이다. 언젠가 딸과 함께 가지 초밥을 만들 날이 오면, 그 식탁 위로 2026년 봉녕사에서 보낸 가을도 함께 떠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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