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코 법대를 가라는 아버지 말을 쌩 무시하고 국문학과를 지원한 탓에 나는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한 푼도 아버지로부터 지원받지 못했다. 당시 집안의 경제권을 아버지가 쥐고 있었기에 여자라도 무조건 배워야 한다고 지지해 주던 엄마조차 막내딸 학비를 대주고 싶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가시적인 핑계일 뿐 아버지는 애초부터 딸자식 공부에 심혈을 기울일 의지가 없었다.
만약 공부를 시킨다 해도 당신처럼 국내 최고 학부 명단에 이름을 올릴 게 아니라면 대학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식이었다. 더욱이 뼈대 있는 경상도 양반 가문의 체통으로 치면 여자는 그저 밖으로 나돌지 않고 어느 나이까지 배우고 익혔으면 시집 잘 가서 애 낳고 그 집에 뼈를 묻는 게 도리라는 것이 아버지의 논리였다.
그러나 거기엔 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있었다. 요즘 세상에 중고등학교만 졸업해서 무슨 수로 시집을 잘 갈 수 있단 말인가. 대학을 졸업한 잘난 여자들이 차고 넘치는데 어느 집에서 중졸, 고졸 며느리를 반가이 맞아 검은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살다 뼈를 묻도록 해주겠는가 말이다.
물론 학벌이니 집안이니 하는 것들과는 무관하게 오직 상대방이 지닌 매력에 빠져 지고지순한 사랑만으로 결혼해 잘 사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나에겐 무리였다. 뭐 얼굴만 바라보고 살아도 평생 행복하겠다는 남자와 그에 부합한 경국지색의 미모를 갖춘 여자 정도라면 학벌이 무슨 문제가 되겠냐만 내 미모는 그저 눈, 코, 입이 제 자리에 잘 자리한 정도?라는 말이 맞겠다 싶으니 말이다. 그러니 중학교나 고등학교만 나와서 시집 잘 가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왜 여자라고 결혼이 종착역이 되어야 하는지가 나로선 더 큰 불만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셋째 언니에겐 어느 정도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셋째 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중학교 3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고 명문으로 이름난 여고에 가서도 실기로 음악 시험을 치를 때 빼고는 전교 1등 자리를 내놓지 않은 인재였다. 아마 자식 중에 어머니의 지혜와 아버지의 두뇌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으론 셋째 언니가 최고이지 않나 싶다. 굳이 따지자면 나도 언니만큼은 아니어도 상위권의 성적에 있었지만 내가 받는 우등상과 언니가 받는 우등상은 질적으로 달랐다. 상장을 내밀어도 아버지는 크게 관심도 없었고 아버지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듣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아무튼 아버지는 그런 언니에게 주야장천 E여대 의예과를 노래하더니 그예 언니를 그리로 보냈다.
이왕이면 그리도 잘났다고 떠들어댄 S대를 보내지, 굳이 E여대를 고집하냐고 어머니나 자식들이 난리굿을 벌였지만 그것도 이유는 하나였다. 여자는 자고로 거기 여대를 나와야 시집을 잘 간다는 것이었다.
좌우지간 여자는 공부를 잘하나 안 하나 시집 잘 가면 그만이라는 고루한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도리어 딸들의 학구열에 부채질한 결과를 낳은 것도 같다.
나를 비롯해 언니들도 저마다 공부하겠다고 생난리를 치며 손에서 바카라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내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공부해라’라는 말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도리어 ‘바카라 좀 그만 보고 와서 이것 좀 도와라.’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던 것 같다. 남동생이 잠시 사춘기 때 개그에 꽂혀 학교 축제에 여장을 하고 대회에 출전하는 이벤트를 벌이는 바람에 '그런 짓 그만하고 공부나 하라.'는 말을 들은 게 다였다. 그런 동생도 고3이 되더니 밤낮없이 공부에 빠져 거뜬히 K대에 보란 듯 합격했다. 아버지가 인정하는 대학은 이른바 SKY나 E여대가 다였기에 동생도 아버지의 지원권 안에는 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형제들에 비하면 조금 애매모호한 실력이었던 나는 한눈팔지 않고 오롯이 바카라을 파고든 덕분에 장학금도 받고 해서 대학은 들어갔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아버지한테는 그 외 대학이었고 그것도 아버지가 제일 반대하는 국문과에 들어갔으니 나는 학비는 고사하고 이런저런 기타 비용에 대해서도 일절 기대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4년 내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겉으론 아버지 뜻을 어겼다는 명분이었지만 가히 아버지다운 대처였다. 아버지는 구태여 고만고만한 딸자식 공부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나대로 장학금에 도전했고 어찌어찌 매 학기 장학금으로 등록금을 해결했다. 그러나 대학이 어디 등록금만 해결되면 된다던가. 바카라도 사야 하고 점심도 먹어야 하고 어쩌다 커피도 한잔 마셔야 했으며, 경우에 따라선 라면이나 떡볶이도 사 먹어야 했다. 때로는 예쁘다 싶은 옷도 사 입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이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 종일 수업이 있는 날은 점심을 챙겨 먹는 것도 큰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오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부지런히 점심을 싸들고 다녔지만 시험 기간이 되면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밖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선택한 메뉴가 사근동 시장 바닥에서 싸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이나 떡볶이, 순대 같은 먹거리였다. 뭐 저녁 먹는 시간까지 아끼기 위해 공부했다는 새빨간 거짓말은 하지 않을 테다. 그런 날보다는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으니까 말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리 없었지만 나는 그런 먹거리에 나름대로 행복감을 느끼며 즐길 수 있었다. 내 옆에는 항상 나의 처지를 이해해 주고 나를 응원해 주는 사려 깊은 친구 셋이 나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그들과 웃고 떠들면서 고단한 대학 생활을 까맣게 잊곤 했다.
어찌 됐든 나는 당당히 대학을 잘 마치고 싶었다. 장학금 때문에 성적도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결국 방학 때를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아르바이트는 교통정리였다.
1일 4시간, 주 5일 40일이면 한 학기 등록금을 벌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그만큼 경쟁률도 높아 학교에서는 아르바이트 신청자 중에 보통 성적순으로 끊어서 당락을 결정해 통보해 주었다. 교통정리가 없을 때는 구청과 동사무소 보조업무로, 또 신문사 결산공고를 받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학년 그 뜨거웠던 여름방학, 교통정리를 하느라 동아리 행사였던 성지순례에 참여하지 못했던 나는 라일락꽃 흐드러지던 5월에 나를 좋아한다며 고백해 왔던 동기에게 또 보기 좋게 이별 아닌 이별을 통보받았다.
아니, 그때는 그게 이별을 말하는 것인 줄도 알지 못했다.
과 수석을 해야 등록금 전액이 나왔고 차석이라도 할라치면 등록금에 10% 모자란 장학금이 나오기에 나로선 수석이든 차석이든 죽기 살기로 공부해야 했고, 그런대로 만족한 결과를 얻었지만 나의 그 동기는 나때문데 F학점까지 받았다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는 나를 좋아하면서 자기는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너는 어떻게 그 와중에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냐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내 탓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내가 정말 공부를 뒤로 할 만큼 그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미안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웠다. 나는 여전히 그 동기를 좋아했지만 그는 그 얘기를 끝으로 나와 이별했다. 나로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학교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그것이 그를 더 만날 수 있는 길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짧은 만남에 비해 이별의 아픔은 강했다.
서툴렀던 사랑만큼 나는 그 아픔의 깊이를 걷어내는 것에도 서툴렀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맹목적인 것이기도 해서 이별의 원인이 무엇이든 아주 오래도록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헤어지자는 말도 듣지 못한 채 이별 아닌 이별을 겪으며 나는 나에게서 멀어져 간 동기로부터 이렇게 공부하느라, 아르바이트하느라, 정신없는 나에게 연애 따위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치장 같은 것인지도 깨달았다. 아프지만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즐길 수 있을 때 즐길 수 있는 것을 택했다.
새벽녘 고즈넉한 하늘 밑 학교의 중앙도서관을 들어가기 위한 긴 줄도 좋았고 조금만 부지런하면 창가 쪽 같은 자리를 맡을 수 있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간혹 중앙도서관 자리를 못 잡아도 차선으로 앉을 수 있는 인문관 도서관도 마음에 들었고, 도서관에서 아는 얼굴의 친구를 만나는 일도 즐거웠으며, 남은 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기꺼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나는 이리에 밝지 못해 좀 어리바리하고 다소 맹하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이성과 감정에 충실하자는 다소 아이러니한 기치 아래 매사를 즐겁게 받아 들이고자 했다.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멈추지 않았고, 동아리도 꾸준히 참여했으며, 학교 밖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회합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리 시간도 꾀를 피우거나 하지 않았다.
4년을 쉽지 않게, 숨차게 달렸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Carpe diem!
나의 대학 4년은 이 한 마디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