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살던 집 앞에는 개천이 하나 있었다.
평소에는 다섯 살 꼬맹이도 발장구를 칠 만큼 얕은 곳이지만, 장마 때나 태풍이 찾아올 때면 인근 산에서 몰아치는 물줄기로 개천은 삽시간에 범람하곤 했다. 그때마다 개천가에 사는 동네 사람들은 집 앞으론 도저히 빠져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뒤쪽 창문으로 겨우 몸만 피해 고지대에 자리했던 교회와 초등학교로 피신했다.
불어난 개천은 사자처럼 포효하며 때로는 동네에서 키우는 돼지를, 혹은 닭들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기도 했다. 심지어 어린애가 떠내려가는 것을 군인이 뛰어들어 간신히 구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린 나에게 개천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물이 가문 날에도 나는 여간해선 개천에서 놀지 않았다. 아마 나는 그때, 물이란 닥치는 대로 뭐든 집어삼키는 괴물 같은 존재라고 이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딱 한 가지 좋은 게 있었다. 그건 물난리를 피해 초등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수재민에게 배급되는 라면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참 가난했던 시절, 온전히 혼자서 라면 한 개를 끓여 먹을 수 없었던 그때, 가구당 지급되는 라면은 비교적 풍족했다. 더구나 6남매에 엄마, 아버지까지 여덟 명의 대가족을 꾸렸던 우리는 좀 더 많은 라면을 받을 수 있었다.
평소 엄마가 겨우 한두 개 정도 라면을 섞어 칼국수를 끓일라치면 우리는 하나 같이 칼국수 사이 드문드문 섞여 있던 꼬불꼬불한 면발을 찾느라 눈알을 부라렸고 그때마다 엄마는 다 똑같은 면인데 뭘 골라 먹느냐며 지엄한 눈총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그토록 귀한 라면을 칼국수 한 가락 섞지 않은 채 그냥 온전히 먹을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 뜨거워지는 순간이 아닌가. 아, 어린 시절 나에게 라면은 그런 것이었다. 심지어 라면만 먹을 수 있다면 매일 물난리가 닥쳐도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추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의 도시개발 계획으로 그 일대 개천 복개 공사가 시작되었고, 무허가로 지어진 하천부지 집들은 모두 철거 대상이 되었다. 결국,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며 그곳을 떠나야 했다. 더는 물난리도 없었고 구호품인 라면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라면을 극도로 싫어하게 된 건 바로 대학에 다닐 때부터다. 반드시 6남매를 공부시키겠다는 엄마의 결연한 의지로 다섯째인 나도 대학에 들어갔고 막내인 남동생 역시 고3 수험생으로 우리 가족이 생계를 이어가는 건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때문에 엄마에게 손 벌릴 수 없었던 나는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하느라, 또 방학 때면 바카라값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하느라, 청춘을 즐길 틈이라곤 요만치도 없었던 터였다.
그러다 보니 점심은 도시락으로 그냥저냥 해결했지만, 도서관에 남아 공부할라치면 저녁은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학교 앞 분식점이나 시장터에서 제일 싼 게 라면이나 떡볶이, 순대 같은 먹거리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3학년쯤 되었을 땐 분식집 앞을 지나다가 라면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는 바람에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곤 했다. 하지만 결국,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것도 그 라면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치던 과 동기들 역시 돈이 넉넉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대개가 라면에 소주 마시기를 즐겼고 가끔 등 떠밀려 함께 했던 나는 소주와 라면 국물에 빠져 서글픈 눈물로 술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결국 4학년을 마칠 때쯤 내 위는 탈이 나고 말았다. 대학을 졸업하며 내과를 찾았던 나는 의사로부터 면류 일체는 물론, 맵고 짠 음식은 일절 금하며 당분간 찹쌀죽에 간장, 김 정도로만 식사해야 한다는 극약 처방을 받았다.
그래도 삶에 대한 애착은 깊었는지 나는 즉시 라면을 멀리했고 온라인 게임을 다니게 되면서도 라면만큼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라면 소리만 들어도 넌더리가 났다. 그 초등학교 시절, 라면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라면 봉지만 봐도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치는 내가 남았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자그마치 10년을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던 라면이었다.
그러다 서른셋의 늦은 나이에 나는 운명처럼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이란 것을 하며, 필연처럼 그 라면을 먹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첫애를 임신하고 물조차 마실 수 없었던 극심한 입덧으로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마저 그대로 생고생하던 터에 라면 한 그릇이 대안이 될 줄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그랬다. 입덧을 시작한 지 거의 일주일간 뭐든 먹으면 토하기 바빴던 나는 탈수 때문에 산부인과에서 링거까지 맞아가며 당시 온라인 게임이었던 학원을 나가야 했다. 그만 두면 모를까 개인적 이유로 학원 수업을 펑크낼 수 없었다.
같은 학원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보다 못해 무작정 나를 이끌고 인근 제과점을 찾았다. 사실 제과점이라기보다는 분식집을 겸한 빵 가게였다. 학원에 근무하는 동안 공강 때면 밥 대신 빵으로 요기할 수 있어 단골이 되었는데, 내 사정을 알던 주인장이 라면을 먹어 보면 어떻겠냐고 권해 온 것이다.
나는 10년이나 멀리했던 라면이 별안간에 넘어가겠냐며 코웃음을 쳤지만, 남편은 막무가내로 시도해 보자며 라면 한 그릇을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기겁하던 나는 아무런 징후도 없이 면발을 입으로 가져갔고, 게걸스럽게 라면 한 그릇을 뚝딱 먹어 치웠다.
나도 무슨 일인가 싶을 만큼 놀랐고, 남편도 덩달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죽을 것만 같던 입덧의 지옥에서 라면은 구세주처럼 나에게 다시 와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라면 순례를 시작했고 라면이라 불리는 모든 종류를 섭렵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입덧 지옥의 종지부가 라면이라니, 더구나 10년 동안이나 멀리했던 라면을 어떻게 단 한 번을 게우지 않고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어린 시절, 물난리 통에서도 그토록 맛있게 먹었던 라면을 꿈꾸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대학생 때 나의 허기를 채워준 것도 라면이었을진대 철없이 들이붓던 술 때문에 탈이 났을지도 모를 위염에 그저 애꿎은 라면만 홀대한 셈이다. 아마 그런 내가 한편으론 라면에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열 달 후 건강한 아들이 태어났고 이제 라면은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K-라면의 위상이 그렇듯 우리 집 두 아들과 남편 또한 라면 마니아가 된 것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영양의 불균형을 생각해 어릴 땐 특별히 라면-DAY를 정해놓고 먹게 했지만, 만 18세를 넘기면서는 아들들 재량에 맡겼더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렇게 라면은 이제 우리 가족의 전천후 양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 라면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