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방

byMari

나의 지붕이자 엄마의 전부였던 오빠는 서른셋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5월, 신록이 눈부신 날의 아침이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몇 시간 만에 나의 가족은 오빠의 주검과 맞닥뜨려야 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을까.

땅이 꺼진다는 것도...


주말에 오랜만에 친구들과 낚시를 다녀온 오빠는 갑자기 발생한 고열로 동네 병원에 갔고 홍역이라며 약을 처방받았지만 하루 이틀 사이에 병세는 금세 악화되었다. 오진이었다.

대학병원에 갔을 때는 패혈증으로 이미 손댈 수 없이 간 치수가 치솟은 뒤였다.

응급 처치 후 중환자실에 들어간 오빠는 다음 날 아침,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오빠의 주치의는 이미 오빠의 간 상태가 최악이었고 미세한 감염조차 해독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서른셋, 너무나 짧은 생을 마감했던 나의 오빠는 이제는 그렇게 엄마의 가슴에 묻힌 채 엄마의 남은 생에 여전히 살아남았다. 2남 4녀의 장남이었고 사망 직전까지 공무원이자 대학원생이기도 했던 오빠는 그야말로 엄마의 희망이었고 엄마의 삶 자체였다.


오래도록 가족의 생계에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 대신 오빠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에 도전했고 공무원이 되어서야 야간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야간 대학을 졸업한 오빠는 바로 석사 과정에 임하며 공무원으로, 대학원생으로 그야말로 엄마에게는 세상 최고의 아들이었다.


그런 오빠가 비단 엄마에게만 듬직한 사람이었을 리 없었다.

다섯 동생에게도 오빠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거대한 방파제였고 아버지 몫까지 거뜬히 해주는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오빠가 엄마에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되고 얼마나 든든한 삶의 버팀목이 되었을지 가늠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다음 해 낳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키우며 엄마는 그 후로도 내리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지만 아버지에게 엄마는 늘 모자라고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무식한 마누라였다.

경상도 한 지방의 유지였던 외할아버지는 아마 네 딸 중 제일 예쁘고 손재주도 좋고 지혜로우며 요리도 잘하는 셋째 딸을 이웃 마을 양반가 장남에게 선도 안 보고 보내며 그 장남이 서울대를 다닌다고 하니 종내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떵떵거리며 살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시집가자마자 오빠와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난다는 막내 삼촌을 키운 거나 진배없이 거두어야 했고 오빠를 시작으로 6남매를 홀로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도 엄마는 배운 사람을 남편으로 뒀다는 그런 자부심에서였는지, 아니면 한 집안의 맏며느리라는 자리가 주는 위압감이었는지, 고향을 벗어나 서울에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도 아버지를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 같다.


더구나 엄마를 늘 함부로 말하고 아내에게 살가움이란 눈곱만큼도 찾기 어려운, 무뚝뚝하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울, 전형적인 경상도의 가부장적인 그런 남편을 마지막 순간까지 거둔 사람도 엄마이고 보면 엄마는 그저 아버지를 엄마 인생에서 하나뿐인 운명의 사람으로 여겼던 게 아닌가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엄마에게 의지할 밖에 없는 여섯이나 되는 자식이 눈에 밟혀 아버지와의 결별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오빠는 전적으로 엄마 편이었다.

오빠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언제나 엄마를 보호했고, 아버지의 폭언에 맞섰고, 아버지의 무기력을 대신해 엄마와 함께 집안의 가계를 떠맡았다.


오빠도 엄마도 아버지와는 달리 배우는 것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자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켜야 한다는 엄마의 의지에 날개를 달아준 것도 오빠였다. 더욱이 소학교 밖에 못 배웠다는 걸로 아버지와 사는 한평생 무시 당했던 엄마는 유독 자식들의 공부에 집착했고 오빠는 그런 엄마를 한결같이 응원하고 지지했다. 오빠는 마치 엄마의 곁을 지키는 보디가드이자, 용감무쌍한 기사 같았다.


그리고 요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는 수도권에 한창 도시가스가 유입되던 때 설비 업체를 대행하며 떼돈을 벌어들였다. 도시가스 설비 사무실에 4~5명의 기사를 두었는데 아버지는 따로 돈 들이는 것조차 아까웠는지 엄마한테 기사들의 점심을 짓게 했고 엄마한테는 알량하게 그 비용만 내놓았다.

아버지는 부자가 되었지만 우리 가족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엄마는 수도 없이 아버지에게 하소연했지만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제 돈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엄마는 진저리를 쳤지만 오빠는 그런 아버지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마음 쓰지 말라고, 그래도 돈 못 버는 예전보다는 낫지 않겠냐며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 곁에는 내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엄마의 마음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런 오빠를 세상 밖으로 떠나보낼 때 엄마는 넋이 나간 채 오빠의 영정을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에게는 실오라기만 한 힘도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용인 공원묘지에 오빠를 묻고 돌아오던 날, 엄마는 오빠를 가슴에 묻었다.

가장의 바카라임을 오빠에게 떠맡겼던 아버지를, 평소 살갑게 장남을 거느리지 못했던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엄마는 오히려 '내가 죄가 많아 그 아까운 아들을 잃었다'며 몇 날 며칠을 통곡했다.

하지만 절대 엄마의 잘못이 아니었다.


오빠를 잃은 내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나는 혹시나 엄마가 오빠를 뒤따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느라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엄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작은방에 차려진 성모상 앞에서 엄마의 기도는 더 길어졌고 성당으로의 걸음은 더 잦아졌다.

엄마는 가슴에 묻은 오빠를 오롯이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염원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렇다 해도 엄마는 더는 오빠가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

엄마는 더는 크게 웃지도, 더는 울지도 않았다.

다만 오빠의 기일마다 오빠의 묘 앞에만 앉으면 한 해 흘리지 못한 그 눈물을 다 쏟아내며 오열했다.


오빠의 죽음은 남은 형제들의 삶에 생각지도 않은 경우의 수를 만들었다.


의대를 졸업한 셋째 언니는 공보의를 마치고 전문의를 따는가 싶더니 바로 의료 선교사로 몽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동생은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대기업 회사를 때려치우고 미국의 실리콘밸리로 떠났다.

둘째 언니네는 딸을 데리고 시카고로, 대단한 부자와 결혼했던 큰언니는 한때 돈 문제로 오빠와 불협화음이 있었던 형부와 헤어진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잠적했다.


엄마는 자식들을 훌륭히 키웠지만 넘치게 훌륭히 키우는 바람에 엄마 곁에는 덩그마니 나와 내 가족만 남았다. 그리고 엄마는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아니, 아프지 않았던 게 더 이상했던 지난날들이었다.


돈이 없던 가난한 시절에도 한량 기질을 버리지 못했던 아버지는 주머니 돈이 두둑해지고 은행에 돈이 쌓이자 중계동이며 흑석동이며 멀리는 대전까지 부동산 구매에 열을 올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오피스텔을 구해 집을 나가는 자유로운 삶을 택했다.

10년 가까운 외유였다.


1년에 한두 번 출장 차 한국에 들르던 남동생은 차라리 아버지와 이혼하는 게 어떠냐고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는 이혼만은 안 된다고, 죽어서 아들 얼굴이라도 보려면 그것만은 안 된다고 단호히 말했다.


끝내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엄마는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며 아버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나는 그런 엄마를 위해 한번만 엄마를 보러 와 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했지만 아버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빈털터리가 되어 치매에 걸린 채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기꺼이 아버지를 받아 주었다.

아버지를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엄마는 엄마의 일을 다 한 듯 호스피스 병동에서 고즈넉이 숨을 거두었다.

엄마는 비로소 꿈에 그리던 아들을 만나러 가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 평온했다.


그렇게 25년 가까이 가슴에 묻은 아들과 함께했던 엄마의 여정은 외롭고 힘들었지만 오빠는 죽어서도 어떤 식으로든 엄마의 방에 머물며 엄마의 마지막 생을 부여잡고 있었다.


엄마는 마침내 아들을 만났고 그제야 엄마의 방을 밝히던 촛불 하나가 꺼지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그렇게 먼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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