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기분 안 좋은 날

26.10.07.

by맹꽁

지친 것인가. 지친 척을 하는 것인가. 화난 것인가. 화난 척을 하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도저히 내 마음을 짐작할 수 없다.


기분이 여과되지 못하고 찌꺼기 가득한 표정이 드러난다. 입 밖으로 꺼드득 까드득하는 금속성의 소리가 난다. 알아줬으면 싶다가도 영원히 몰라줬으면 하는 기분 위에 파도가 친다. 드러났다가 감춰들었다가 한다. 차라리 이런 내게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보고자 매달 돌아오는 달력 위의 날짜를 세어보지만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다. 괜히 아무 잘못 없는 남편에게 삐진 척을 했다.


아무래도 이만 퇴근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야근을 하는 팀원들을 위해 저녁을 주문하라는 팀장님의 지령이 떨어졌다. 전날 하루만 주문하고 슬그머니 피하려 했던 내게 해일이 몰아쳤다. 날 선 단어들로 메뉴를 취합하는 쪽지를 돌렸다. 활자들을 입력하며 살짝 베이기도 했지만 괘념치 않는다.


당연히 막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당연한 일은 대체 무엇인가. 회의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러다 음료를 제로콜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튕겨나가 버리고 말았다. 멀쩡한 기분이었다면 당연히 알아서 챙겼을 부분이다.


제로콜라가 아니라서 안 먹겠다는 사람들이 콜라를 놓고 햄버거만 가져갔다. 남은 콜라와 감자튀김을 치웠다. 괜한 자존심으로 나는 햄버거를 주문하지 않았다. 20분가량 더 일하다 제일 먼저 퇴근했다. 퇴근길에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 내가 확인을 덜 한 게 있었다고 한다. 기분이 뒤죽박죽이다.


햄버거를 먹지 않은 탓에 주린 배를 채우려 초콜릿을 입에 쑤셔 넣고 지하철을 탔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서 하염없이 개그맨들의 유튜브를 봤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하필 배차시간이 20분이었다. 긴 퇴근을 마치고 집에 오니 9시 30분이다.


씻고 나니 곧 10시라 자야 할 시간이지만 이 기분으로 자기 싫었다. 그래서 전날 쓰다가 마무리하지 못한 글을 수정했다. 마음이 한결 나아진다. 그럼에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기분이 있어 오늘의 일기를 쓴다.


기분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오늘의 나도 나지만, 더 이상 나를 잃기 싫다. 일기를 쓰니 해일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진다. 오늘의 내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한껏 기분대로 행동했던 낯이 뜨거워진다.


피천득 작가님은 말했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피천득


글은 내게 숲 속으로 난 고요한 길을 산바카라하게끔 한다. 그리고 나는 이내 잠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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