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3.
때는 지난주 월요일 아침, 여느때처럼 시누이와 둘이 연락을 하다가 삿포로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게 됐다. 일본을 너무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삿포로를 사랑하기에, 이미 3번이나 다녀왔음에도 그리워하는 우리였다. 더군다나 연이은 야근으로 몸이 지친 시점에 삿포로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항상 입 밖으로 흩어졌던 말들이 그날따라 색을 띄고 실체로 부풀어 올랐다. 말이 나온지 30분 만에 삿포로행 비행기를 예매한것이다. 그것도 5일 후, 2박 3일 뿐인 여행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심지어 친구도 남편도 아닌 시누이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을 기획해버렸다.
시누이와 나의 관계는 역사가 깊다. 내가 20살, 시누이가 23살이었을 때 처음 만난 뒤로 지금까지 8년 간의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다만 우리 둘의 관계가 우정이었다는 사실은 이 여행이 끝난 뒤에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나 혼자만의 팬심으로 시누이를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알 수 없는 거리감과 어색함이 방패막 처럼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방패막 옆에는 항상 남편이 서주었다. 하지만 알을 깨고 나오는 데미안처럼 2박 3일의 세상에 나를 알몸으로 내던진 것이다.
갑자기 몽롱한 공포심이 몰려왔다.
그리고 설렘이 솟아올랐다. 여자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은 28살의 막바지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처음이었다. 친구가 없고 (정말 없다.) 회사를 통해 알게 된 소중한 언니들 몇명과만 인간관계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더욱 두근 거렸다. 슬롯적 겉옷을 입은 우정만을 겪어보았던 나도 드디어 날 것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설렘과 공포라는 양극단의 것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이륙의 기쁨을 안다. 지상에서 박차고 오를 때 발 밑에서 약동하는 힘을 느낀다. 이 힘은 현재의 시간을 힘차게 밀어내고 새로운 시간을 채울 수 있는 들뜬 공간을 마련해준다. 나는 빈 공간 안에 신생의 시간을 멈춰 세워 놓고 다시 일상의 시간으로 되돌리겠노라 약속한다. 그 멈춘 시간 속에서 나만의 간극이 만들어진다.
백바지를 입은 옆자리 할아버지는 똑같이 백바지를 맞춰 입은 할머니의 손을 찾아 헤매다 결국은 맞잡는데 성공한다. 갑자기 가슴 옆부근이 찌르르하고 울리다 그 진동이 눈까지 퍼져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눈물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마음이 다 젖으면 눈물은 짜내어진다. 우연을 핑계 삼아 손수건 한 귀퉁이 끝도 적시지 못할 눈물을 짜내놓았으면서도 가슴이 한결 후련하다. 눈물을 다 짜고 난 후 묵직했던 가슴이 쪼그라들면서 생긴 빈자리에 시큰시큰한 바람이 느껴진다. 새순의 비릿한 아픔이다.
때묻은 몸이 씻겼다. 알을 깨고 나와서 여행을 즐길 시간이다. 3시간의 비행 후 따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침 시누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는 두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때맞춰 웃었다. 현실과의 간극 위에서 우리 둘은 함께다.
단풍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단풍은 찌르릉거리기도하고 파스슥거리기도 했다. 캐리어가 나오는 곳을 착각했을 때, 우리가 사랑하는 편의점 에비마요 삼각김밥을 한 입 먹었을 때, 차창 밖에 무지개가 보인다고 우겼을 때 단풍 잎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듣지 못했던 과거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우리가 가족이라는 실감이 났다. 가족과 단풍색 우정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다.
우리의 이번 여행의 목적은 소소했다. 삿포로에서 어떠한 관광도 즐기지 않을 것, 그저 마음의 향수를 충족시킬 것. 오후 5시 버스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