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밤, 다른 흔적
하늘은 더 높아져
무서리 잦아지고
재촉하는 철 마디에
한 해 걷이 끝물이라
나뭇잎
깊어진 시름
산에 불을 지핀다
밤새
누가 다녀갔는지
풀잎마다
하얀 발자국을 남겨 놓고
아침 볕이 들자
말없이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없이
떠나는 것들은 떠나고
끝내 가지에 남은 잎들은
제 몸속 푸른 날을 삭혀
고운 물들인다
한 잎
또 한 잎
저마다 품었던 시간을
마지막 빛으로 내놓으니
나뭇잎
깊어진 시름에
또,
한철이 저문다
어제 내일 기온을 확인해 보니
최저 0도
당연히 산천리에는 영하로 내려갈 것이므로
오후 내내 바빴다.
서리 맞으면 더 이상 쓸모없는 일 년 농사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이 있는지 이리저리 다니며 마무리 거둠을 했다.
절기가 이렇게 잘 맞았나 하며
아침에 농장을 한 바퀴 돌다가 걸음을 멈췄다.
한쪽 호박잎은 서리를 맞아 축 늘어져 있었다. 키가 크고 잎이 넓은 것들은 특히 눈에 잘 띄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 있던 잎이 힘을 잃고 땅으로 처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은 달랐다.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곳인데 멀쩡한 풀이 있었다. 같은 종류에서도 하나는 상하고 하나는 그대로였다.
특히 토종 큰 엉겅퀴는 온몸으로 받았고, 가시엉겅퀴는 전혀 지나간 흔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햇볕이 먼저 든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인가 싶었다. 낮고 높은 자리 때문인가도 생각했다. 농장에는 바람이 지나가는 곳이 있고 머무는 곳이 있다. 산과 맞닿은 곳도 있고 트인 곳도 있다.
이유를 하나로 정하기는 어려웠다.
조금 더 걸어가니 잎이 넓은 풀들은 대체로 많이 상해 있었고, 잎이 가느다란 풀 가운데는 그대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잎이 좁아서 서리를 견뎠다고 말할 수는 없다. 풀의 종류도 다르고 자란 정도도 다르다.
눈앞에 있는 것은 결과뿐이다.
농장에 들른 정사장이 서리 맞은 풀을 보고 말했다.
“이제 다 얼었겠네요.”
나는 주변을 한번 더 둘러봤다.
“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상한 것 옆에 멀쩡한 것이 있었다.
농사를 오래 지었다고 날씨를 잘 맞히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번 보고 단정하는 일이 줄었다. 어젯밤 기온은 하나였겠지만 농장 바닥에서 지나간 밤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었다.
조금 전 지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 보았다.
축 늘어진 잎 옆에 가느다란 풀 하나가 그대로 서 있었다.
같은 밤을 지났는데,
누구에게나 같은 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