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霜降)

같은 밤, 다른 흔적

by김규남

1. 열여덟 번째 절기 상강(霜降)


하늘은 더 높아져

무서리 잦아지고


재촉하는 철 마디에

한 해 걷이 끝물이라


나뭇잎

깊어진 시름

산에 불을 지핀다




2. 또, 한 철이 저문다


밤새

누가 다녀갔는지

풀잎마다

하얀 발자국을 남겨 놓고


아침 볕이 들자

말없이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없이

떠나는 것들은 떠나고


끝내 가지에 남은 잎들은

제 몸속 푸른 날을 삭혀

고운 물들인다


한 잎

또 한 잎

저마다 품었던 시간을

마지막 빛으로 내놓으니


나뭇잎

깊어진 시름에

또,

한철이 저문다




3. 같은 밤을 보내고도


어제 내일 기온을 확인해 보니

최저 0도

당연히 산천리에는 영하로 내려갈 것이므로

오후 내내 바빴다.


서리 맞으면 더 이상 쓸모없는 일 년 농사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이 있는지 이리저리 다니며 마무리 거둠을 했다.


절기가 이렇게 잘 맞았나 하며

아침에 농장을 한 바퀴 돌다가 걸음을 멈췄다.


한쪽 호박잎은 서리를 맞아 축 늘어져 있었다. 키가 크고 잎이 넓은 것들은 특히 눈에 잘 띄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 있던 잎이 힘을 잃고 땅으로 처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은 달랐다.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곳인데 멀쩡한 풀이 있었다. 같은 종류에서도 하나는 상하고 하나는 그대로였다.

특히 토종 큰 엉겅퀴는 온몸으로 받았고, 가시엉겅퀴는 전혀 지나간 흔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햇볕이 먼저 든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인가 싶었다. 낮고 높은 자리 때문인가도 생각했다. 농장에는 바람이 지나가는 곳이 있고 머무는 곳이 있다. 산과 맞닿은 곳도 있고 트인 곳도 있다.


이유를 하나로 정하기는 어려웠다.


조금 더 걸어가니 잎이 넓은 풀들은 대체로 많이 상해 있었고, 잎이 가느다란 풀 가운데는 그대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잎이 좁아서 서리를 견뎠다고 말할 수는 없다. 풀의 종류도 다르고 자란 정도도 다르다.


눈앞에 있는 것은 결과뿐이다.


농장에 들른 정사장이 서리 맞은 풀을 보고 말했다.


“이제 다 얼었겠네요.”


나는 주변을 한번 더 둘러봤다.


“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상한 것 옆에 멀쩡한 것이 있었다.


농사를 오래 지었다고 날씨를 잘 맞히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번 보고 단정하는 일이 줄었다. 어젯밤 기온은 하나였겠지만 농장 바닥에서 지나간 밤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었다.


조금 전 지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 보았다.

축 늘어진 잎 옆에 가느다란 풀 하나가 그대로 서 있었다.


같은 밤을 지났는데,

누구에게나 같은 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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