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가슴앓이
그칠 줄 모르더니
서산 끝에 맺힌 하루
한 방울씩 떨어지고
빈 들은
더 아래로 몸을 낮춘다
이 밤이 지나면
바람 끝 달라질 것을
오래 흙을 만진 손은
먼 산보다 먼저 안다
어스름도 막지 못하는
강을 건너온
느린 듯 또렷한 소식 하나
어디쯤
놓치면 안 될 것이 있다고
찬 기운 닿기 전에
거두어야 한다는데
나는 창밖을 본다
산자락은
어둠 속으로 멀어지고
본 적 없는
잘 여문 열매 한 톨
아쉬움 하나
계절의 끝을 붙잡고 있다
놓을 듯
놓지 못한 것들은
그렇게
한 철을 건너와
젖은 저녁 한편에
가만히
온기로 남는다
어제저녁부터 내린 가을비가 오늘도 하루 내내 내렸다.
가을걷이한 것 중, 말려야 할 것이 많아 농부의 가을은 비가 온다고 한가하지는 않다. 오래된 농부들은 가을비가 오면 곧 추워진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한다. 그래서인지 저녁 무렵 이종섭 어르신에게 전화가 왔다.
“노란 야광나무 열매가 있는데, 붉은 것은 많아도 노란 것은 귀해”
야광나무 열매(산사자)는 늦가을이면 익는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따야 하는데 때를 놓쳐 서리를 맞으면 물러져 버린다. 어르신은 그 열매를 구해다 주겠다고 한다.
“괜찮아요.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제가 가서 따올게요.”
몇 번을 사양해도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
“아니야. 따 줄만 하니 따주지.”
내가 토종식물과 엄나무를 연구하는 것을 아시니 어디에서 조금 특이한 나무를 보거나 열매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지난 5월에도 집 근처에 큰 엄나무가 있다며 한번 가보자고 하셨다. 마침 어르신을 모셔다 드릴 겸 함께 가서 나무를 찾았고, 나는 그곳에서 엄나무 씨앗을 채취했다.
우연하지 않게 뵙는 일이 가끔 있다.
신북에서 뵈면 댁까지 모셔다 드리곤 한다. 평소 버스를 타고 다니시니 내가 차가 있으니 그냥 보내드리기가 그렇다. 읍사무소에서 과수원에 쓸 농약을 받아온 날이면 그것도 차에 함께 싣는다.
가는 동안 농사 이야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쓰다가 모르는 것이 생기면 물으시고, 나는 아는 만큼 알려드린다.
젊어서는 과수원을 8천 평이나 하셨지만 팔십 중반인 지금은 500평 남짓한 밭뙈기를 돌보는 일도 힘에 부친다고 한다. 예전에는 원예조합 이사직을 오래 하셔서인지 사람 관계와 배우는 데 나이를 앞세우는 법이 없다. 사람을 만나길 좋아하고 손에 무엇이라도 생기면 나눌 사람부터 생각하는 분이다.
어르신에게는 오랫동안 아픈 아내가 있었다.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이었다고 한다.
흔히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지만 부부라고 그 세월이 쉬웠을 리 없다. 서로 기대며 살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자신에게 기대기 시작했고, 어르신은 남편으로, 때로는 버팀목으로 그 긴 시간을 곁에서 지켰다.
석 달쯤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어르신은 그 소식을 따로 알리지 않았고 나도 장례가 끝난 뒤에야 알았다. 뒤늦게라도 마음을 전했는데, 그다음 주에 만나자 하시더니 밥을 사셨다.
빚지고 못 사는 그런 사람이다
.
그래서인지 저녁 무렵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쉽게 지나가지 않았다. 이제는 혼자되셔서 당신 몸 하나 돌보기도 예전 같지 않을 나이에 내 건강에 필요할 것 같다며 노란 열매를 챙기고 있었다.
“제가 가서 따오면 된다니까요.”
다시 사양했지만 소용없었다.
“아~ 됐어.”
전화를 끊고 한동안 생각했다.
내가 어르신에게 먼저 전화한 기억은 없다. 그런데 아직 보지도 못한 노란 야광나무(산사자) 열매 때문에 전화가 왔다. 그것도 가을비를 보고 때를 맞춰 생각하지도 못한 전화였기에 더 오래 남는다.
사람 사이의 일이 꼭 준 만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쪽에서 건너간 작은 마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참 뒤에 돌아온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결과가 지난봄에는 엄나무 씨앗이 되었고, 늦가을에는 노란 열매가 되어 오고 있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따야 하기에 때를 놓치면 못쓰는 것은 맞다.
나는 어르신 아내의 마지막 길에는 때를 놓쳤다. 그래서인지 아직 받아보지도 않은 노란 열매가 자꾸 마음에 남는다.
이번에는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내일은 어르신께 가야겠다.
밥 한 끼 드시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