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시간이 시작된 날의 산바카라
새벽 공기가 부쩍 찼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기어이 비집고 들어온 서늘함 때문인지, 이불을 걷어차고 배를 내놓은 채 자던 몸도 조금씩 움츠러들며 다소곳해진다. 그렇게 새벽녘에도 계절이 건너가고 건너옴을 안다.
오늘 새벽에는 여느 때와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잠시 눈을 떴는데 창문 너머의 어둠과 적막이 채 걷히지 않았다. 전날의 고단함에 오래 몸을 맡겼나 싶어 전자시계를 보니 오전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밖은 여전히 깜깜했다. 짙은 새벽의 그늘이 아직 물러나지 않은 것 같아 무심코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6시였다. 잠결에 두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제야 알았다. 밤사이 서머타임이 해제되어 시계가 한 시간 뒤로 돌아간 날이었다. 자동으로 시간이 바뀐 휴대전화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대로인 전자시계에는 아직 7시가 남아 있었다.
분명 어제와 같은 하루인데 한 시간이 덤으로 생긴 것 같았다. 전날의 피로를 제법 오래 잠으로 보내고도 아직 6시라니. 조금은 느긋해져도 될 것 같았다. 곁에서 잠에 덜 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반려견을 데리고 산바카라을 나섰다. 반려견 역시 서두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녀석이 이끄는 느린 발걸음을 따라 올리브밭으로 향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가지마다 송골송골 달려 있던 올리브는 어느새 수확을 마친 듯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열매를 덜어낸 나뭇가지들은 한차례 숱을 친 것처럼 제법 가벼워져 있었다. 그 아래 잔디에는 밤사이 내려앉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반려견이 풀숲을 오갈 때마다 잔디 끝의 물기가 털에 묻어났다.
그 길에서 간간이 마주치는 이웃 아주머니와 두 마리 강아지도 만났다. "Dobro jutro." 아침 인사를 나누고는 제법 차가워진 공기에 옷깃을 여미었다. "Mrzlo." 춥다는 짧은 말과 몸짓이 오갔다. 아주머니는 이어 달라진 시간에 관해 이야기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이어지는 사이, 검지로 시곗바늘을 돌리는 듯한 몸짓이 보였다. 서머타임이 끝난 것이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다른 표현으로 답했다. "Zimski čas."
겨울을 뜻하는 말도, 시간을 뜻하는 말도 알고 있었다. 따로 알고 있던 두 단어가 나란히 들려 아주머니의 말을 따라 되물었다. "Zimski čas?" 뒤이어 건넨 설명까지 모두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래도 조금 전의 몸짓과 내가 알아들은 몇 단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겨울 시간. 이곳에서는 서머타임이 해제되고 표준시로 돌아온 것을 그렇게 불렀다. 그 말은 내게 겨울이 시작되는 시간 같았다.
아침부터 평소보다 자주 헬기 소리가 들렸다. 이날이 슬로베니아의 주권의 날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래도 풍경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고, 늘 걷던 길과 올리브밭도 그대로였다. 지나가며 마주친 이웃들의 대화에서도 달라진 시간을 이야기하는 듯한 말들이 들려왔다. 이런 날에는 달라진 시간 자체가 자연스럽게 아침 인사가 되는 모양이었다. 어느 계절이 물러나고 다음 계절이 넘어오는 경계에 이렇게 모두가 한꺼번에 시간을 옮겨놓는 일이 있다는 것이 새삼 흥미로웠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직 바뀌지 않은 시계들을 하나씩 한 시간 뒤로 맞췄다. 고작 한 시간 물러났을 뿐인데 오늘은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평소보다 조금씩 길었다. 이쯤 됐겠지 싶어 시계를 보면 생각한 시간보다 이르고, 무언가를 제법 오래 하고 다시 봐도 아직 그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직 저녁 7시 반이다.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남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카라을 펼쳤다. 반려견은 저녁 산바카라을 마치고 돌아와 잠자리를 잡았다. 나는 아침부터 자꾸만 길게 느껴졌던 오늘을 쓰고 있다. 하루라는 단위에도 덤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게 묘하다. 시계의 태엽을 한 시간 뒤로 돌렸을 뿐인데, 하루를 감아두던 태엽까지 조금 느슨하게 풀어놓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