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와 방향

익숙한 것들이 다른 각도로 들어오는 가을

by슬로하라


아침저녁으로 공기의 얼굴이 제법 서글서글해졌다. 옷장 속 옷들도 이사를 시켜주었다. 칸을 나누고, 꺼냈다 넣었다, 걸었다 접었다 했다. 옷장 봉에는 좋아서 하나씩 들인 옷들이 빼곡히 걸렸다. 입고 싶은 것과 입어야 할 것, 사고도 입지 못한 것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러다 지난 한 계절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더 오래 손이 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옷에서 시작한 일은 금세 다른 곳으로 번졌다. 가방과 신발을 꺼내보고 서랍을 열었다. 어느새 쓰임을 잃고 소품처럼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것, 서랍 속에서 눈에 띌 기회조차 얻지 못한 물건들도 눈길이 닿는 대로 다시 들여다보았다.

올해가 시작될 무렵부터 눈에 걸리는 것들을 하나씩 비워보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물건을 쉽게 놓아주는 편이 아니다. 애정하던 것을 잃어버리면 같은 것을 다시 사서 그 자리를 채워놓기도 했다.

그런 내가 이번에는 방 한편에 오래 머물러 있던 바카라상을 나눔 했다. 쓰는 날보다 그 자리에 있는 날이 훨씬 많았지만, 없애고 나니 가려져 있던 벽과 바닥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의자들도 내놓았다. 이곳에 올 때 집에는 이미 대부분의 가구와 가전이 갖춰져 있었다. 침대를 제외한 큰 살림은 한국에서 정리하고 왔는데도 몇몇 의자는 굳이 챙겨 왔다. 막상 이곳에서는 원래 있던 식탁 의자들과 번갈아 자리를 차지했고, 이번에는 그것들도 내보냈다.

오래 그 자리에 놓여 있던 물건은 들어 올려 먼지를 닦고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서랍 속에서 오랜만에 발견한 것은 한참 들여다보다 다시 넣기도 했다. 꺼냈다가 도로 넣고,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어떤 것은 보내고, 어떤 것은 남겼다.

며칠 전에는 거실의 식탁도 돌렸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사각 식탁은 한쪽 벽에 붙어 가로로 놓여 있었다. 그 배치가 답답하게 느껴져 한동안은 원형 식탁을 들여놓고 써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원래 있던 식탁으로 돌아왔다. 살아보니 이 공간에는 그 배치가 가장 나은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해를 지냈다.

한 번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고도 결국 돌아온 배치였으니 그동안은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생각까지 한번 움직여보고 싶었다. 그 식탁을 벽에서 떼어내 세로로 돌렸다. 식탁과 벽 사이에도 약간의 공간을 두었다.

같은 식탁이고 같은 거실인데 앉는 방향이 달라지자 보이는 것도 달라졌다. 한쪽에 앉으면 그동안 오래 바라볼 일 없던 하얀 벽이 눈앞을 채웠다. 시야가 벽에서 멈추는 것이 생각보다 포근했다. 반대편에 앉으면 익숙한 거실 바닥과 그 위에 놓인 것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도 산만하지 않았다.

한자리에서 오래 바라본 만큼 그 방향으로 쌓인 시간도 많았다. 바꾸고 싶었던 것은 식탁의 방향이었을까, 오래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일이었을까.

올해가 이제 석 달도 남지 않았다. 한낮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지만 공기는 어느새 다음 계절로 넘어가고 있다. 아직 완전히 넘어오지 않은 계절의 공기를, 오래 제자리에 머물던 것들도 함께 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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