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위 밖에서 건너온 안부
마트에서 뜻밖의 인사를 받았다.
평소 반려견과 산바카라하다 놀이터에서 종종 마주치던 이웃이었다. 산바카라길도 아니고 반려견도 곁에 없던 터라, 나를 먼저 알아보고 건넨 인사에 낯선 반가움이 스쳤다. 호기롭게 "Kako ste?"(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되물었지만, 그 뒤로 이어진 내 말은 고작 "Vse je dobro."(다 좋아요.) 정도였다. 한국어였다면 반가움을 표현하며 지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갔을 텐데, 그날은 세 마디도 채 넘기지 못했다.
이번 주에만 그런 일이 두 번 있었다. 반려견 덕분에 얼굴을 익힌 서로 다른 두 이웃이 마트에서 나를 알아보고, 반려견의 안부까지 물었다. 산바카라길 밖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다.
며칠 전 산바카라길에서 만난 또 다른 이웃 아주머니는 'Torta'라는 말을 꺼냈다. 케이크라는 뜻은 알았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어설프게 호응만 하고 집에 돌아와서야 지난번에 물었던 반려견의 생일이 떠올랐다.
아주머니 집에는 열아홉 살 노견 베니와 세 살 된 강아지가 있다. 두 친구 모두 같은 주에 생일을 맞는다. 지난번 우리 반려견의 생일에는 공을 선물해 주셨기에 나도 그 친구들의 생일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31일(enaintridesetega)로 알아들었던 날짜가 13일(trinajstega)이었던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주머니를 다시 만나 물었다.
"Včeraj Beni imel rojstni dan?"
어제 베니 생일이었어요?
문법에도 맞지 않는, 아는 단어를 겨우 이어 붙인 질문이었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알아듣고 맞다고 하셨다.
뒤늦게 축하 인사를 건네자 아주머니는 직접 만든 케이크와 생일파티 사진을 보여 주셨다. 그러고선 케이크를 조금 나눠 주겠다며 전화번호도 물으셨다. 여러 번 마주치고도 몰랐던 서로의 이름을 그날 처음 알았다.
잠시 뒤 아주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다시 만난 자리에서 종이 접시에 담긴 케이크 네 조각을 건네받았다. 나도 전날 생일을 짐작하고 미리 사둔 노견용 간식을 건넸다.
열아홉 살 노견의 생일을 위해 손수 케이크까지 만든 정성이 대단하다고, 그 친구가 오래도록 건강하기를 바란다는 마음도 전하고 싶었지만, 내가 건넨 말은 축하한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또 다른 이웃은 아홉 살 검정 코카스패니얼 비앙카와 함께 다니는 백발의 할머니다. 진주 목걸이를 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늘 눈에 띄었다. 비앙카는 점잖고 사람의 손길을 좋아했지만, 어린 우리 반려견의 부산스러운 인사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짧은 인사만 나누었다. 알아듣지 못한 말은 되묻거나 짐작해 대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휴대전화에서 사진을 한참 찾으시더니 아들과 손자, 그리고 홍콩 사람이라던 누군가의 사진을 대뜸 보여 주셨다.
산바카라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사실도 하나씩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밀라노에서 30년을 살았다는 것, 비앙카가 어린 우리 반려견을 질투한다는 것. 할머니는 그런 비앙카를 가리켜 'ljubosumna'(질투하는)라고 하셨다.
며칠 전 저녁,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려는데 할머니가 함께 걷자고 하셨다. 우리는 두 강아지를 데리고 천천히 걸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할머니가 "Mrzlo."(추워요.)라고 하시면 나도 맞장구를 쳤다. 강아지들의 배변 장소를 찾으며 할머니는 연신 "Gremo naprej."(계속 가요.)라고 하셨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헤어질 때 할머니는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셨다.
할머니는 혼자 지내시는 것 같았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날의 산바카라이 할머니에게도 편안했기를 바랐다. 진주 목걸이가 멋지다고, 옷차림이 늘 멋지다고 말하고 싶었다. 밀라노에서의 생활과 비앙카를 만나게 된 이야기도 궁금했다.
하지만 마주하면 꺼낼 수 있는 말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데 집중하다 보면 묻고 싶었던 것을 잊었고, 하고 싶었던 말들은 집에 돌아온 뒤에야 떠올랐다.
슬로베니아에서 지낸 지도 3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내가 준비한 말로만 살아온 것 같다. 필요한 말을 외우고, 예상할 수 있는 대화 안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그 범위 밖에서 안부가 건너왔다. 어느새 이웃의 선을 살짝 넘어온 모양이다.
요즘은 집에 돌아와 그날 하지 못한 말들을 적어본다. 번역기에 돌리고 AI에게 물으며 뒤늦게 문장을 완성한다.
다음에는 내 안부를 묻는 그들에게 나도 조금 더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