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말보다 먼저

반려견을 위해 병원에서 대신해야 했던 말들

by슬로하라


한국에서는 이미 시작된 추석 연휴. 이곳의 아침에도 분주함은 있었다. 다만 그 모든 분주함은 반려견을 향해 있었다. 전날 저녁에 물그릇을 치워두고, 아침에는 물이 남아 있을 만한 곳이 없는지 집 안을 다시 살폈다. 사료 투정을 부리는 요즘이라 곳곳에 뱉어 놓은 사료 알알들을 혹시라도 다시 주워 먹지 않게 치웠다.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에는 배변 산바카라을 다녀왔다.


아침 일찍 잡힌 중성화 수술. 친정엄마의 생신이기도 했다. 유독 그날은 한 날짜에 여러 일이 겹쳐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일이었다. 추석이라고 문을 닫는 곳도, 아침부터 명절을 준비하는 사람도 없었다. 친정엄마의 생일 역시 멀리서 흘러가는 하루였다. 내가 있는 곳에서 평소와 다른 아침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반려견의 수술이었다.


수술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궁금한 것들을 찾아봤다. 이곳에서는 암컷의 중성화 수술을 'sterilizacija'[스테릴리자치야]라고 했다. 암컷이든 수컷이든 그저 '중성화'라고 생각했는데, 성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슬로베니아어를 배우다 보니 수술을 부르는 단어도 다르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쓸 일 없던 단어부터 하나씩 알게 되었다. 중성화 수술을 검색하면 수술 전 준비부터 회복 과정까지 수많은 경험담이 나왔다. 그것들을 읽다 보니 오히려 물어볼 것도 늘었다.


난소만 절제하는지, 자궁까지 함께 절제하는지. 수술 후 실밥은 언제 풀러 가야 하는지. 첫 발정이 끝난 뒤부터 이불이나 방석을 파고, 배와 젖꼭지를 자주 핥는 행동이 있었는데 이것도 미리 알려야 하는지.


궁금한 것을 알아내는 일과 그것을 이곳의 의사에게 전달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병원에서 묻고 싶은 것들을 영어로 준비했다. 최근 보였던 행동은 혹시라도 의미가 달라질까 싶어 문장으로 만들어 번역해 두었다. 휴대전화 노트에도 적고, 바로 찾아 보여 줄 수 있게 몇몇 문장은 화면을 캡처해 두었다.


내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도, 말해야 할 것을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반려견의 일이라면 그랬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내가 먼저 전해야 할 말들이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의사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준비해 간 문장을 입으로 차례차례 꺼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번역해 캡처해 둔 문장을 띄워 의사에게 보여 주고, 휴대전화 노트에 적어둔 것도 화면째 건넸다. 입으로 다 꺼내지 못한 말들을 손가락으로 찾아가며 하나씩 내밀었다.


말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다. 평소라면 조금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하지 못해도 다음이 있었다. 다시 물을 수도 있었고, 집에 돌아와 찾아볼 수도 있었다. 그러지 못해도 대개는 괜찮았다. 대화가 어정쩡하게 끊기면 그 정도에서 넘어가도 됐고, 다 전하지 못한 말은 그대로 남겨 두어도 됐다.


그런데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빠뜨린 말이 있어도, 반려견이 그 뒤를 이어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내가 놓친 것이 나 하나의 문제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아는 단어만으로 짐작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모르면 다시 묻고, 알아듣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 되지 않으면 화면을 내밀었다.


반려견을 병원에 맡겨 두고 나오고 나서야 아침부터 붙들고 있던 긴장이 조금 느슨해졌다. 밖은 여전히 평범한 평일 오전이었다. 엄마에게 생일 축하 연락을 하고, 다시 병원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침에 한 날짜 위에 겹쳐 있던 일들은 저마다 다른 곳에서 제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수술을 마친 반려견을 데리러 갔을 때는 이번에는 내가 들어야 할 말들이 있었다. 수술은 어떻게 되었는지, 집에 돌아가서는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 언제 다시 병원에 와야 하는지. 평소라면 좀처럼 쓸 일 없는 수술과 회복에 관한 단어들이 설명 속에서 연달아 나왔다.


의사의 말은 빨랐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 몇 개를 겨우 알아채며 앞뒤의 뜻을 맞췄다. 알아들은 것과 알아듣지 못한 것을 머릿속에서 가르는 동안에도 의사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다행히 듣고 있다 보니 내가 물으려고 준비해 간 것들 대부분의 답이 그 안에 있었다. 실밥은 언제 풀러 가야 하는지 궁금했는데, 일주일 뒤 상태를 확인하러 오면 되고 따로 제거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준비해 간 질문은 하나둘 줄어들었다.


한국의 중성화 경험담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 두었던 과정과는 조금 달랐다. 알아들은 것이 맞는지 의사의 말을 머릿속으로 몇 번 되짚었다.


반려견은 아직 마취가 덜 풀린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의사에게 안겨 나왔다. 입가에는 침이 흥건히 묻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별생각 없이 받아 안았을 텐데, 막 수술을 마친 몸이라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손을 대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워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 물었다. 의사는 몸을 받치는 위치를 손으로 짚어 가며 보여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말 대신 살펴야 할 것들이 생겼다. 끙끙대지는 않는지, 제대로 걷는지, 물은 마시는지. 평소와 다른 움직임 하나에도 눈이 갔다.


말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는 때때로 말보다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미리 찾아본 문장, 번역기의 도움을 받은 몇 줄, 휴대전화 속 캡처 화면. 필요하면 조금 부끄럽더라도, 말이 서툰 것을 감추지 않고 그것들을 말 대신 건네는 일까지.


그리고 당분간 그녀의 상태를 안내하기 위한 문장도 입에서 한참을 되뇌었다.


"Ona je bila sterilizirana."

[오나 예 빌라 스테릴리지라나]

그녀는 중성화 수술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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