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고 싶은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내부자 Trilogy : 우장훈과 임규남 사이에서

byMinseung Kang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사람들


영화 〈내부자들〉(우민호 감독, 2015)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부패가 아니라 내부다. 부패는 범죄의 내용이지만 내부는 그 범죄가 지속되는 형식이다. 정치인과 재벌과 언론인이 서로의 욕망을 교환하고 검찰이 그 거래를 보호하는 세계에서 법을 어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가이다. 내부자는 비밀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비밀이 드러난 뒤에도 자기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목이 〈내부자〉가 아니라 〈내부자들〉인 것도 그래서다. 이 세계의 권력은 한 명의 악당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돈을 내는 사람과 기사를 쓰는 사람, 선거에 나가는 사람과 수사를 막는 사람이 역할을 나누어 가진다. 누구도 전체를 지배하지 않지만 모두가 서로의 약점을 조금씩 보유한다. 이들의 결속은 신뢰가 아니라 공모에 가깝다. 함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배신을 막고, 서로를 폭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의리를 대신한다. 내부란 친밀한 공동체가 아니라 상호 협박이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체계다.


이강희(백윤식)는 그 체계의 중심에 있다. 그의 권력은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사건에 이름을 붙이고 그 사건이 슬롯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를 결정한다. 재벌의 돈은 그의 손을 거치며 정치적 후원이 되고, 정치인의 야심은 시대의 요구로 번역된다. 범죄는 실수나 음해가 되고, 유력자는 검증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미래를 맡길 지도자로 가공된다. 이강희가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중을 단순히 경멸해서가 아니다. 그는 대중의 판단이 사실보다 명명에 좌우된다고 믿는다.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를 장악한 사람이 권력을 가진다는 확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강희는 사건을 은폐하는 언론인이 아니라 현실을 편집하는 사람이다. 영화가 언론 권력을 가장 위험한 내부자로 배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벌은 돈을 제공하고 정치인은 권한을 약속하지만, 그 거래를 정당한 질서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언어다. 폭력은 사람을 침묵시킬 수 있지만 언어는 침묵을 동의로 바꾼다. 내부의 질서는 폭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누가 유능한 사람이고 누가 위험한 사람인지, 무엇이 소신이고 무엇이 항명인지, 어떤 범죄는 관행이고 어떤 잘못은 엄벌해야 할 일인지를 구분하는 권한을 통해 유지된다.


안상구(이병헌)가 그토록 오랫동안 착각한 것은 이 권력의 본질이다. 그는 내부의 비밀을 알고, 은밀한 자리에 불려 다니며, 권력자들이 직접 하기 곤란한 일을 처리한다. 그러나 비밀에 접근했다는 사실은 그를 내부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비밀을 너무 많이 알게 된 순간, 그것은 소속의 증거가 아니라 제거의 사유가 된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내부로의 출입이지 내부에서의 지위가 아니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이 언제든 그를 밀어낼 수 있다면 그 출입증은 특권이 아니라 목줄이다.


안상구는 이강희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이 호칭에는 조직폭력배의 위계와 한국 슬롯의 유사 가족주의가 함께 들어 있다.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대가를 요구할 수 있지만 형과 동생의 관계에서는 충성이 먼저이고 보상은 은혜가 된다. 이강희는 안상구의 노동을 거래로 인정하지 않고 충성으로 바꾼다. 안상구가 위험을 감수해도 그것은 값을 치러야 할 노동이 아니라 아우가 형님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된다. 권력은 이렇게 계약을 친밀함으로 위장하고, 보상을 약속 대신 시혜로 바꾼다.


안상구의 잘린 손은 배신의 흔적이기 전에 이 관계의 실체가 새겨진 신분증이다. 권력은 그의 폭력을 필요로 했지만 그 폭력을 행사한 사람까지 바카라임질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남을 협박하고 때릴 때에는 충직한 동생이지만 자기 몫을 요구하는 순간 분수를 모르는 깡패가 된다. 내부자는 자신을 위해 규칙을 어겨도 보호받는 사람이고, 외부자는 내부를 위해 규칙을 어긴 뒤 그 바카라임을 혼자 떠안는 사람이다. 안상구는 내부의 가장 더러운 일을 맡았지만 바로 그 일을 맡았기 때문에 끝내 내부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복수를 정의의 귀환으로만 읽으면 영화의 불편한 핵심이 사라진다. 안상구가 분노한 것은 부패가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 부패에 충성하고도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비자금 파일 역시 처음부터 공익을 위한 증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약속받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담보였고, 거래가 파기된 뒤에야 폭로의 무기가 된다. 그의 정의는 배신감과 모욕감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그 불순한 동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이다. 사람은 반드시 정의로워서 부당한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혜택을 받을 줄 알았던 질서에서 배제됐을 때 비로소 그 질서의 부당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장훈(조승우)의 욕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성공을 포기하는 검사가 아니다. 수사에 성공하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승진하려는 사람이다. 열심히 일해서 승진하고 싶다는 욕망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오히려 문제는 조직이 능력과 성과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같은 집요함도 윗사람이 인정하면 추진력이 되고 불편해하면 독단이 된다. 같은 수사도 권력의 필요와 맞으면 소신이지만 거스르면 조직을 모르는 객기가 된다. 실적이 경력이 되려면 누군가 그 실적에 이름을 붙이고 다음 자리로 옮겨줘야 한다.


우장훈에게 없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후견이다. 그는 법의 안쪽에 있지만 권력의 안쪽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그의 정의감과 출세욕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는 옳은 일을 해서 성공하고 싶어 한다. 영화는 이 평범하고 정당해 보이는 욕망을 통해 내부가 사람을 유혹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권력은 처음부터 부정한 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능력을 알아주겠다고 말하고, 실패했을 때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며, 열심히 일한 만큼 자리를 보장하겠다고 제안한다. 판단을 넘겨주는 대가는 돈만이 아니다. 인정과 승진과 안전 역시 사람을 충분히 복종시킨다.


안상구와 우장훈은 그래서 선량한 외부자들의 연대가 아니다. 둘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입장을 거부당한 내부자 지원자들이다. 안상구는 충성을 바쳤지만 버려졌고, 우장훈은 실적을 쌓았지만 선택받지 못했다. 한 사람에게는 내부의 치부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을 공적 사건으로 만들 제도가 있다. 둘의 결탁은 정의를 위한 연대인 동시에 자신들을 배제한 인사 질서에 대한 반격이다. 폭로는 진실을 드러내는 행위이면서 닫힌 문을 부수는 최후의 인사 전략이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통쾌함은 의심스러워진다. 권력자들이 독점했던 비밀은 공개되고 그 비밀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몰락한다. 그러나 내부자를 생산하는 질서까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안상구와 우장훈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다시 버려지지 않도록 문을 넓힌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밀어낸 사람들을 끌어내리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부패한 내부자들을 처벌하지만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문 자체를 철거하지 않는다. 관객이 목격한 것은 체제의 변화라기보다 입장권을 둘러싼 승부의 역전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강희가 안상구에게 약속한 몫을 주었다면, 안상구는 그 체제를 폭로했을까. 검찰이 우장훈의 능력을 일찍 인정하고 승진을 보장했다면, 그는 권력의 거래를 끝까지 파헤쳤을까. 두 사람이 내부에 들어간 뒤에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문을 열었을까. 오히려 자신이 어렵게 통과한 문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자신 같은 사람부터 밀어냈을지도 모른다. 이 질문을 지우는 순간 〈내부자들〉은 선량한 외부자가 사악한 내부자를 응징하는 권선징악이 된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그보다 훨씬 불편하다. 내부의 부패를 가장 잘 아는 사람조차 자기 자리가 보장된다면 그 문법을 거부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부가 유지되는 까닭은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보호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으며, 자기가 한 일을 자기 이름으로 돌려받고 싶은 평범한 욕망을 내부가 독점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모든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충성을 명령할 필요가 없다. 문 하나를 열어줄 수 있다는 가능성만 보여주면 된다. 사람들은 그 문을 통과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권력자가 원하는 말을 먼저 하고, 명령받지 않은 일까지 알아서 처리한다. 명령이 사라진 자리에서 충성은 오히려 자발적으로 과잉된다.


내부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안으로 끌어줄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고 그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부자가 되려는 사람이 반드시 부패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다만 부패한 문을 없애는 것보다 그 문이 자신에게만 늦게 열린 사실을 더 억울해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내부의 문법을 배우고 있다.


자기 이름으로 살아갈 권리


영화 〈굿뉴스〉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에게는 이름이 없다. 사람들은 그를 ‘아무개(설경구)’라고 부른다. 남파공작원의 아들이라는 출신 때문에 공식적인 신분조차 갖지 못한 채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를 수행한다. 납치된 비행기를 착륙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그는 불가능한 요구를 실행 가능한 작전으로 바꾼다. 진실과 거짓을 뒤섞고 사람들의 공포와 믿고 싶은 마음까지 이용해 누구도 풀지 못한 일을 해결한다. 일을 한 사람은 아무개지만 그 일의 주인은 아무개가 아니다.


아무개의 익명성은 단순한 별명이 아니라 국가가 그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름과 직바카라이 없으므로 작전이 성공해도 그의 공로는 기록되지 않고, 성공은 국가와 지휘관의 결단으로 돌아간다. 실패해도 아무개가 공식적인 바카라임자로 지목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그런 사람에게 임무를 맡긴 적이 없다고 부인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바카라임자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실패의 대가는 기록 밖에서 아무개가 치르게 될 것이다. 권력은 그의 능력을 이용하면서도 그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성공의 공은 가져가고 실패에 대한 바카라임은 피할 수 있다. 아무개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권력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고, 바로 그 이름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 속할 수 없다.


영화는 아무개가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일하는지 돈이나 이념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에 ‘고명’이라는 이름이 적힌 주민등록증을 보상으로 내민다. 그에게 이름은 명예나 유명세가 아니라 일이 끝난 뒤에도 존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증명이다. 아무개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만 호출되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유능함은 자유를 얻는 수단이 아니라 다음에도 불려가기 위한 생존 조건이 된다. 조직이 유능한 사람을 가장 값싸게 부리는 방법은 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면서도 이름과 자리는 주지 않는 것이다.


안상구와 아무개는 모두 권력이 직접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대신하지만 자신과 권력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안상구는 이강희를 형님이라 부르고 충성을 바치면 출입이 소속으로, 친밀함이 지분으로 바뀔 것이라 믿는다. 그에게 충성은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투자다. 아무개에게는 그런 환상이 없다. 남파공작원의 아들이며 공식적인 신분조차 없는 자신이 아무리 큰일을 해내도 권력자의 자리를 나눠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를 받으며 권력의 안쪽을 드나드는 것도 내부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공식 조직이 바카라임질 수 없는 일을 대신 처리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안상구는 출입을 소속으로 착각하지만 아무개는 자신의 출입이 사용을 위한 것임을 안다.


두 사람이 배제되는 방식도 다르다. 안상구는 내부자의 몫을 요구한 뒤 자신에게 허락된 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몸을 훼손당하지만, 아무개에게는 애초에 넘을 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가장 중요한 일을 수행하면서도 그곳에 있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없다. 안상구가 자신도 내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에 잘려나간다면, 아무개는 결코 내부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에 계속 이용당한다. 따라서 아무개는 내부자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권력의 지분 대신 자신이 한 일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을 최소한의 신분을 요구하는 사람이다. ‘고명’이라는 이름은 노력 끝에 내부자가 됐다는 증표가 아니라, 내부자의 자리를 포기한 대가로 겨우 얻어낸 존재증명에 가깝다. 안상구가 같은 테이블에 앉기를 원한다면 아무개는 자신이 그 테이블을 위해 일했다는 사실만이라도 남기를 바란다. 그가 끝내 얻은 이름 한 줄은 성공의 크기가 아니라 그에게 허락된 욕망의 한계를 보여준다.


〈굿뉴스〉가 이름의 소유권을 묻는다면 〈탈주〉는 삶의 방향을 정할 권리를 묻는다. 리현상(구교환)은 탈주를 꾀한 임규남(이제훈)을 처벌하는 대신 탈주범을 붙잡은 영웅으로 바꾸고 사단장 직속보좌 자리까지 마련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잘못을 공적으로 바꾸고 막힌 앞날을 한순간에 열어주는 후견이다. 조직 안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일수록 그 제안이 얼마나 강력한지 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성실보다 한 사람의 확실한 인정이 훨씬 빨리 인생을 바꾼다.


현상의 제안이 강력한 것은 그것이 현실적인 욕망을 정확히 겨냥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게임인을 서럽게 하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일하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직에서 인정은 연봉과 승진, 다음 기회로 구체화된다. 누군가 내 실력을 알아보고 실패의 바카라임을 함께 감당하며 더 나은 자리까지 보장해준다면 그 제안을 거절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현상의 손을 뿌리치는 규남은 현실적인 온라인 게임인이라기보다, 인정과 성공보다 자기 삶을 결정할 권리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판타지에 가깝다.


현상은 규남에게 복종하라고 먼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자리를 받고 나면 규남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고하고 어떤 말은 삼켜야 하는지, 누구의 실패는 덮고 누구의 잘못은 드러내야 하는지를 헤아리게 된다. 후견의 완성된 형태는 명령하지 않아도 작동한다. 처음에는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후견인의 판단이 자기 판단보다 먼저 떠오른다. 목줄은 밖에서 채워지기보다 안에서 자란다.


현상이 제시한 것은 성공만이 아니다. 성공의 정의까지 대신 정해주는 삶이다. 규남은 노력과 능력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앞날을 결정할 권리를 넘겨야 한다. 내가 너를 살렸으니 이제 네 삶은 내 판단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안의 숨은 조건이다. 후견은 규남의 실패를 지워주지만 그와 함께 실패할 자유도 빼앗는다.


현상의 말이 잔인한 까닭은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디에서든 제약을 받으며 살고,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며 살 수도 없다.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 타협해야 하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르기 어려운 자리도 있다. 가족을 부양하고 빚을 갚으며 조직 밖에서 다시 시작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그냥 나오라는 말은 자유의 권유가 아니라 비용의 전가가 되기도 한다. 내부자가 되지 않겠다는 결심은 마음의 순결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거절한 뒤에도 살아갈 물질적 여유와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규남의 탈주는 성공이 보장된 남쪽을 향한 질주가 아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선택이다. 현상이 실패를 공적으로 둔갑시켜주지 않아도 되고, 성공했을 때 누구의 은혜로 얻은 자리인지 평생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규남은 내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성공을 받는 대가로 내부자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이다.


아무개와 규남은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지만 같은 권리를 요구한다. 아무개는 자신이 한 일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고, 규남은 자신이 갈 방향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한 사람에게 없는 것은 이름이고 다른 사람에게 위협받는 것은 미래다. 내부는 이 둘을 보상과 보호의 언어로 사들인다. 네 이름을 남겨주겠다, 네 실패를 막아주겠다, 네 앞날을 열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 이름과 미래를 누가 소유할지도 정한다.


그러므로 내부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인정과 보상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살아남겠다는 영웅주의도 아니다. 도움을 받더라도 판단까지 넘기지 않는 것, 누군가의 인정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지 않는 것, 성공뿐 아니라 실패도 자기 몫으로 남겨두는 일이다. 더 높은 자리를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리를 준 사람이 자기 미래까지 소유하게 두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비싸고,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현실의 우리는 아무개처럼 일하면서 현상을 기다리고, 규남처럼 달리는 사람을 보며 잠시 자유를 응원한다. 내부자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의 고독은 문밖에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문이 열렸는데도 그 안으로 들어가는 대가가 자기 판단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데서 시작된다.


변두리의 내부자


나는 오랫동안 묵묵히 일하면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누가 앞으로 나섰는지, 누가 일이 끝난 뒤 숟가락을 얹었는지 조직의 사람들은 다 안다고 생각했다. 직바카라은 위에서 임명할 수 있어도 평판까지 임명할 수는 없으니, 성실하게 일하고 실력을 쌓으면 언젠가는 제 몫의 이름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절반만 맞았다. 사람들은 대개 안다. 누가 일을 했고 누가 공을 가져갔는지, 누가 바카라임을 떠안았고 누가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숨겼는지 알고 있다. 다만 안다는 것과 말한다는 것은 다르고, 말한다는 것과 자리를 나눈다는 것은 더 다르다. 조직은 진실을 몰라서 불공정한 것이 아니다. 진실을 알고도 그것을 인사와 권한의 언어로 번역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불공정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인은 우장훈 검사와 비슷하다. 열심히 일해서 실적을 내고 승진하려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조직을 무너뜨리기보다 그 안에서 제 몫을 얻고 싶어 하고, 정의가 승리했다는 추상적인 보상보다 연봉과 승진이라는 계산 가능한 보상을 원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한 일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면 화가 났고, 나보다 일을 못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먼저 올라가면 불공정하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나는, 어떻게든 조직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도 아니다. 비밀이지만 그리고 아무도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사실 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승진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 넘기고 더 넓은 바카라임을 떠안을 생각도 크지 않다. 요즘의 조직에서는 올라갈수록 보상보다 업무량과 바카라임이 더 빠르게 늘어난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내 노동이 부당하게 지워지지 않는 정도의 인정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권한에 가깝다.


지금의 나는 조직 밖에 있지는 않다. 말단이기는 해도 관리자이고, 편성표의 결재선에 이름을 올리며 다른 사람의 업무와 기회에 영향을 미력하나마 미치고 있다. 그렇다고 조직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내부자도 아니다. 위에서 정한 방향을 전달받고 그 안에서 선택지를 조정하며, 때로는 권한보다 바카라임을 먼저 만나는 자리다. 내부자라는 원의 변두리, 안과 밖을 구분하는 선의 바로 안쪽 어디쯤에 내가 있다.


이 위치는 답답하지만 편리하기도 하다. 권한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결과에 대한 바카라임에서 물러날 수 있고, 그래도 관리자라고 말하며 조직 밖의 비판과는 거리를 둘 수 있다. 위에서는 핵심이 아니고 아래에서는 이미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조직의 결정을 바꿀 힘은 없었다고 변명하면서도 그 결정을 실행하는 과정에는 참여한다. 변두리 내부자는 중심부의 특권은 충분히 얻지 못하지만 중심부가 만든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의 몫을 흐릴 수 있다.


현실적으로 내게도 리현상 같은 후견자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다들 원하지 않나. 우리를 서럽게 하는 것은 열심히 일했다는 사실보다 그렇게 일했는데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내 능력을 알아보고 실패를 한 번 막아주며 다음 자리를 보장해준다면 온라인 게임인으로서 그만큼 감사할 일이 또 있을까. 줄을 타는 사람을 경멸하면서도 내게는 왜 줄이 없는지 억울해했고, 내가 인정하는 사람이 나를 선택해준다면 그것은 연줄이 아니라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남의 후견은 부당한 특혜였고 내가 받지 못한 후견은 조직이 놓친 공정이었다.


내 욕망은 그렇게 모순돼 있다. 보상받고 싶지만 소유되고 싶지는 않다. 인정받고 싶지만 그 대가로 판단을 넘기고 싶지는 않다. 후견은 필요하지만 후견인의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조직 안에 남아 월급을 받으면서도 조직이 내리는 모든 결정을 나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좋은 것만 취하고 바카라임은 피하겠다는 이기적인 욕망처럼 들리지만,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인이 내부자와 맺는 관계도 이 모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일터에서 이 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복잡해졌다. 나와 정치적 지향이 다른 대통령이 집권하고, 그 권력이 KBS의 사장과 이슬롯를 바꾸며 공정의 기준을 새로 선언할 때면, 나는 회사에서 계속 일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권에 복무하는 것 같은 죄바카라감을 느꼈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과 승인한 편성표가 시청자에게는 모두 KBS의 이름으로 전달되고, KBS의 화면은 다시 국가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방향과 겹쳐 보였다.


그 죄바카라감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례 중 하나는 2024년 광복절에 편성된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시작〉을 둘러싼 일이었다. 이승만을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으로 재현한 영화를 광복절에 방송하는 것은 단순한 프로그램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건국의 출발점으로 삼는 서사에 KBS의 전파를 내어주는 일이었다. 당시 편성팀장이었던 나는 결재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결재선에서 이름을 뺐다. 보잘것없는 이름일지라도 한 번쯤은 의미 있게 쓰고 싶었다. 내가 휴가를 낸 사이 결재는 편성팀장을 건너뛰어 편성부장과 편성국장, 편성본부장으로 이어졌고 영화는 예정대로 방송됐다.


당시 정부가 그 방송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문제는 직접적인 지시가 없어도 그런 방송이 가능해지는 조직의 작동 방식에 있다. 권력이 공영방송을 움직이는 가장 세련된 방법은 매번 명령문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인사권을 통해 조직의 상층부를 바꾸고 무엇이 공정하고 무엇이 편향인지를 새로 선언하면, 구성원들은 권력이 원하는 방향을 먼저 알아내 조직 내부의 언어로 번역한다. 정치적 선택은 ‘다양성’이 되고, 권력과 같은 방향을 향한 편성은 ‘자율적인 판단’이 된다. 내부자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명령이 없어도 조직이 원하는 바를 알아듣는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고 결재를 거부한 내가 조직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내 이름 하나가 빠졌을 뿐 방송은 나갔고, 나는 그 뒤에도 팀장으로 남아 다른 편성표를 승인했다. 거부는 나를 결백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어디까지 가담할 수 있는지를 표시했을 뿐이다. 내부자의 윤리는 바깥에 서서 깨끗함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안에 남아 있으면서도 어떤 결정에는 자기 이름을 내주지 않는 데서 가까스로 시작되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이 구조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2008년 8월 8일, 정연주 KBS 사장에 대한 해임제청안을 처리하기 위해 이슬롯가 열리던 날, 나는 KBS 본관 3층 현장에 있었다. 그날 경찰은 방송사 바깥을 경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사복 경찰관기동대가 이슬롯 시작 전부터 본관 안으로 들어와 시청자광장을 채웠다. 경찰은 이슬롯장 주변을 봉쇄하고 항의하는 직원들을 밀어내고 끌어냈다. 정연주 사장 해임에 반대하는 직원들이 자기 일터에서 국가의 물리력에 의해 배제되는 동안, 이슬롯장 안에서는 해임제청안이 처리됐다.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절차와 그에 저항하는 구성원을 제압하는 절차가 같은 건물 안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표결은 폭력과 분리된 민주적 절차가 아니라 그 폭력이 확보한 통로 안에서 완성됐다.


그로부터 여러 해 동안 나는 정권과 공영방송 사이에서 일했다. 싸웠다는 과거가 이후의 모든 행위를 면바카라해주지는 않았다. 한때 저항했다는 기억은 지금의 침묵을 가려주는 훈장이 되기 쉽다. 조직 안에 오래 남았다는 것은 그 문법을 몰랐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고르고, 사람들이 자리를 얻기 위해 무엇을 먼저 포기하며, 관행이라는 말이 어떻게 판단하지 않은 바카라임을 덮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월급과 자리를 얻어 살아왔다. 2016년의 어느 날, 나는 그 혐의를 스스로에게 이렇게 적었다.


* 좋은 날이 오면 나도 참회와 반성이라는 것을 해야 할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에 부역한 죄에 대하여. 그래서 나는 지금 웬만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미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보다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은 죄도 씻기 버거우니. 나만 이런 것이 아니다. 회사에 괴병이 돈 지 오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부역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침묵과 무위는 권력에 대한 소극적인 거부가 될 수도 있지만, 이미 정해진 방향이 방해받지 않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협조가 될 수도 있다. 조직은 적극적으로 충성하는 사람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결재하는 사람, 바카라임지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하는 사람, 반대 의사를 밝혔으니 자기 몫은 끝났다고 여기는 사람을 통해서도 움직인다. 나 역시 그 구조 밖에 있지 않다.


정치적 지향을 불문하고, 한때 파업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 정권이 바뀐 뒤 자리를 얻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조직을 지킨 사람이 그에 걸맞은 권한을 갖는 것은 정당한 보상일 수 있다. 문제는 투쟁의 경력이 자리를 차지할 영구적인 자격이 되고, 그 자리를 제대로 수행했는지 묻는 일이 과거의 공로를 모욕하는 행위로 취급될 때 생긴다. 저항의 역사가 새로운 내부자의 신분증으로 바뀌는 순간, 조직은 다시 사람과 자리를 분리하지 못한다. (참고로 내가 팀장에 임명된 것은 2023년 11월이다.)


함께 싸웠지만 논공행상에서 밀렸거나, 조직의 변질에 실망했거나, 노조의 정치적 지향이 더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낀 사람들은 조직을 떠나거나 이전과 다른 길을 택하는 모습도 보았다. 그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떠난 것은 아니며 떠났다고 모두 변절한 것도 아니다. 남은 사람의 공로만 조직의 역사가 되면 떠난 사람의 실망과 패배는 개인의 선택으로 축소된다. 그 결과 투쟁은 공동의 기억이 아니라 자리를 얻은 사람들의 경력이 되고, 다음 세대는 누구를 위해 다시 싸워야 하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내부자에 대한 욕망은 하나가 아니다. 안상구처럼 버림받은 뒤 중심부의 비밀을 무기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이 있고, 아무개처럼 이름 없는 노동을 자기 이름으로 돌려받으려는 욕망이 있다. 우장훈처럼 열심히 일한 대가로 승진하려는 욕망이 있는가 하면, 규남처럼 남이 정해준 성공에서 벗어나려는 욕망도 있다. 나의 욕망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중심부까지 들어가고 싶지는 않지만 변두리에서 밀려나고 싶지도 않다. 인정은 받고 싶지만 더 많은 바카라임은 싫고, 후견은 필요하지만 복종은 싫으며, 조직에 남고 싶지만 조직의 모든 선택과 운명을 함께하고 싶지는 않다. 승진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은 없으면서 다른 사람이 올라갈 때 내가 누락됐다고 느끼면 억울하고, 중심부의 권력을 경계하면서도 그곳에서 내 능력을 알아봐주기를 바란다. 이 욕망은 고결하지 않지만 없다고 부정하는 것보다 모순인 채로 인정하는 편이 낫다.


이미 나는 내부자다. 다만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판단을 넘기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조직에 남았다는 사실을 충성으로 바꾸지 않고, 한때 반대했다는 기억을 현재의 면죄부로 사용하지 않으며, 내가 받은 보상을 오직 실력의 결과라고 미화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설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원의 바깥이 아니라 경계의 안쪽이다. 완전히 떠나지도 더 깊이 들어가지도 못한 자리에서, 어떤 결재에는 이름을 올리고 어떤 결재에서는 이름을 빼야 하는지, 이름을 뺀 뒤에도 무엇이 내 바카라임으로 남는지를 묻는 것. 결백을 주장하기보다 내가 어느 순간 누구의 내부자가 되고 있는지를 계속 의심하는 것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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