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명이 변명이 되지 않게

아프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멈출 수 없었을 뿐

byMinseung Kang

눈의 흰자위에 피가 번졌던 날, 의사는 최근에 심한 압박을 받은 일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짧게 답했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의사는 표현을 바꾸어 몇 차례 더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같은 답을 했다. 며칠 전 치과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어금니뿐 아니라 여러 치아에 금이 가 있었다. 치과의사는 오랫동안 이를 악물고 살아온 사람의 치아라고 했다. 그러나 내게는 이를 악문 기억이 없었다.


그 대답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압박을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갑자기 닥치거나 누군가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몰아세우는 것이 압박이라고 생각했다. 반복되는 업무와 미뤄둔 감정, 거절하지 못한 부탁과 대안 없는 생활은 그저 누구나 평소 겪는 일에 속한다고 여겼다. 내가 일상이라고 부른 시간을 몸은 압력이라고 기록했다. 마음이 부정하는 동안 눈에서는 혈관이 터졌고 치아에는 금이 갔다. 또 다른 어딘가에도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 발견되지 않았을 뿐.


혹시 몸과 마음의 병이 갑자기 늘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커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의학 기술이 발달했고 검사받을 경제적 여건도 나아졌으며,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증상에 슬롯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때는 잠을 이루지 못해도 예민한 성격 탓이라고 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도 의지가 약해서라고 했다. 죽을 것 같은 공포가 갑자기 밀려와도 겁이 많은 사람의 유난으로 치부했다. 지금은 불면과 우울, 공황이라는 이름 아래 치료의 대상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말로 견뎌야 했던 고통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늘어난 질병도 있다. 환경과 식생활, 노동과 수명의 변화는 이전과 다른 질환을 만들어낸다. 다만 진단받은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과거의 사람들이 더 건강했고 현대의 사람들이 더 병약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 슬롯의 환자 수는 병의 발생만이 아니라 정상과 질병의 경계를 어디에 긋는지, 누가 검사를 받을 수 있는지, 어떤 고통을 치료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의학은 이미 있던 병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을 병으로 볼 것인지 결정하며, 그 경계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환자로 호명한다. 더 정교해진 시선은 숨어 있던 고통을 구제하는 동시에 이전에는 환자가 아니었던 사람까지 환자로 불러낸다.


한국의 갑상선암은 그 역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건강검진에 초음파 검사가 널리 포함되면서 작고 증상이 없는 종양까지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1993년부터 2011년까지 갑상선암 진단은 약 열다섯 배로 증가했지만 사망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암이 그만큼 빠르게 퍼졌다기보다 평생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작은 종양까지 의료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결과였다. 멀쩡하게 검진센터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 검사 결과지를 받아 들고 암 환자가 되어 나왔다.


2014년에는 의사들이 무증상자의 갑상선 초음파 검진을 자제하자는 공개 운동을 벌였다. 언론도 과잉진단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이후 1년 동안 갑상선암 수술은 약 35퍼센트 감소했다. 사람의 몸이 갑자기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을 들여다보는 방식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진단 기술은 이전보다 작은 암까지 찾아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갔을 사람도 있었다. 발견은 언제나 구원이 아니며 모르는 것이 언제나 무지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병명이 검사 기술의 발전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어떤 고통은 검사할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슬롯가 고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의학도 질병의 언어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됐다. 병명은 현미경과 영상장비에서만 태어나지 않는다.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과 그것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슬롯적 투쟁 속에서도 만들어진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역사가 그 사실을 보여준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악몽과 불안, 분노와 무기력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겁이 많거나 의지가 약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이 고통이 미국의 정신질환 진단 체계에 정식으로 포함된 것은 1980년이었다. 새로운 검사 장비가 참전 군인의 몸에서 전에 없던 병변을 찾아낸 것이 아니었다. 같은 증상을 바라보는 슬롯의 해석이 달라진 것이다. 병명이 생기자 질문도 달라졌다. 왜 이겨내지 못하느냐고 묻는 대신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게 되었다. 진단은 고통의 원인을 개인의 성격에서 전쟁과 폭력의 경험으로 옮겨놓았고, 치료와 보상을 요구할 근거를 마련했다. 의학은 숨어 있던 병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고통을 자신의 언어 안으로 받아들였다.


갑상선암의 사례에서 진단은 필요 이상의 환자를 만들어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이름은 환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을 구제했다. 병명은 사람을 가두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병명이 많아졌느냐 적어졌느냐가 아니다. 그 이름이 고통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고, 바카라임을 누구에게 돌리며, 당사자에게 어떤 권리를 부여하는가이다.


병은 생물학적 상태인 동시에 슬롯적 지위다. 아프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일과 학업, 돌봄과 약속 같은 일상의 의무에서 잠시 물러날 수 있고, 그동안 수행하지 못한 바카라임에 대한 비난도 유예받는다. 그러나 힘들다거나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자신의 호소만으로 그 지위를 얻기는 어렵다. 현대슬롯는 고통보다 인증된 고통을 신뢰한다. 의사의 서명과 질병분류기호가 더해진 뒤에야 개인의 감각은 휴직과 치료, 보상과 배려를 요구할 수 있는 공적인 사유가 된다. 병명은 몸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인 동시에 한 사람이 잠시 멈춰도 된다고 허락하는 슬롯적 증명서다.


그러나 환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환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누구에게나 병상에 누울 형편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한 날만큼 돈을 받는 사람에게 치료는 의료비뿐 아니라 그날 벌지 못한 소득까지 요구한다. 휴직이 곧 생활비의 감소로 이어지는 사람에게 충분히 쉬라는 권고는 옳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처방이다. 자신의 소득에 가족의 생활이 매달려 있는 사람은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병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별것 아닐 것이라고 믿는 편이 당장의 생계를 지키는 데에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2025년에는 대상포진을 앓고 자전거에서 떨어졌으며, 허리디스크로 시술까지 받았다. 그런데 아플 때마다 나는 통증의 크기보다 치료비와 회복에 걸리는 시간부터 계산했다. 몸은 내 것이었지만 그 몸이 벌어오는 월급은 가족의 생활비와 연결돼 있었고, 얼마나 아픈가보다 언제 다시 일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나마 매달 정해진 급여를 받는 나조차 그랬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그날의 수입이 사라지고 휴직과 함께 생계가 흔들리는 사람에게 병원은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병원에 가면 막연했던 통증에 이름이 붙고 치료와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는 외면하기 어려워진다. 차라리 별것 아닐 것이라고 믿으며 출근하는 편이 당장의 생활을 지키는 데에는 유리하다. 병을 몰라서 참는 것이 아니라 병이 요구할 비용이 두려워 모르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에 가족의 생계가 매달린 사람은 몸을 오래 사용해야 할 생산수단으로 다룬다. 통증은 멈추라는 신호가 아니라 업무를 방해하지 않는 수준으로 관리해야 할 변수가 되고, 병원은 회복을 위해 머무는 곳이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다시 가동되기 위해 들르는 정비소가 된다. 가족을 부양하려는 바카라임이 자신을 돌보지 않을 명분으로 바뀌면서 그는 누가 강요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도구로 만든다. 병상에 누울 수 없는 사람에게 건강은 아프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아직 일할 수 있는 상태다.


병명을 둘러싼 불평등은 진찰실에 들어갈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병명을 얻고도 생계 때문에 쉴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병명을 바카라임에서 물러나는 방패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하기 싫은 일을 피하려 증상을 과장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받을 때까지 병원을 옮겨 다니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거짓으로 얻은 면제는 그 일을 대신해야 하는 사람에게 비용을 넘기고, 실제로 아픈 사람의 호소까지 의심받게 한다. 이를 고통받는 개인의 자기방어라고만 감싸는 것은 옳지 않다.


생계를 잃을까 두려워 병을 감추는 사람과 바카라임을 피하려 병을 내세우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같지 않다. 다만 두 사람은 모두 개인의 말만으로는 멈출 수 없는 슬롯에 살고 있다. 피로와 한계, 두려움과 거절은 사적인 감정으로 취급되지만 병원에서 발급된 서류는 공적인 사유가 된다. 쉬어야 할 이유를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사람은 병명을 빌려 말한다. 그때 진단서는 치료의 기록을 넘어 슬롯적으로 허용된 거절문이 된다. 병명은 아픈 사람을 보호하는 방패인 동시에, 다른 이유로 물러나려는 사람이 탐내는 권한이 된다.


문제는 그 권한을 둘러싼 비용까지 개인들 사이에서 정산된다는 데 있다. 한 사람이 치료를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일을 대신할 사람과 제도가 충분하다면 그의 휴식은 누구의 원망도 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이는 조직에서는 누군가의 치료가 다른 사람의 야근이 되고, 한 사람의 회복이 다른 사람의 소진으로 이어진다. 남은 사람은 동료가 정말 아픈지 의심하고, 쉬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병이 충분히 심각하다는 사실을 거듭 증명한다. 환자와 동료가 서로의 고통을 심사하는 동안, 사람을 넉넉히 두지 않고 결원의 비용을 개인에게 떠넘긴 조직은 논쟁에서 빠져나간다.


번아웃이라는 말은 이 바카라임의 이동을 잘 보여준다. 세계보건기구는 번아웃을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인 온라인 게임 스트레스에서 생기는 직업적 현상으로 분류한다. 그 정의에는 고통의 원인이 이미 일터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관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개 조직이 아니라 소진된 사람이다. 그는 상담을 받고 약을 먹으며 수면과 운동, 감정을 관리한다. 업무량과 인력 구조, 오래된 조직문화는 그대로 남는다. 일터에서 생긴 고통을 개인의 몸에 수용한 뒤 그 몸만 수리해 돌려보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압박을 받은 일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도 비슷한 셈법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쓰러지지 않았고 출근할 수 있었으며 맡은 일을 끝내고 있었으므로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치아의 금은 치과의사가 발견하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눈의 혈관도 내가 압박을 부정하는 동안 이미 터지고 있었다. 몸에는 진단서를 발급할 권한이 없으므로 균열과 출혈로 사정을 기록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일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기록을 오래 읽지 않았다.


견딜 수 있다는 것과 건강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병명이 모든 바카라임을 면제하는 허가증이 되어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진짜 환자와 가짜 환자를 끝없이 가려내는 일이 아니라, 병에 걸렸다는 증명 없이도 한계를 말할 수 있고 누군가 물러난 자리의 비용을 다른 개인에게 떠넘기지 않는 질서다. 병명이 변명이 되지 않게 하려면 병든 사람을 더 엄격하게 심사할 것이 아니라, 병이 아니어도 멈출 수 있는 자리를 먼저 마련해야 한다. 사람은 환자가 되기 전에 쉴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쉬기 위해 더 많은 병명을 필요로 하고, 그 병명을 얻은 사람을 더욱 의심하게 된다. 그때 병명은 아픈 곳과 그 원인을 찾아가기 위한 이름이 아니라, 인간이 잠시 멈출 자격을 얻기 위해 제출하는 허가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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