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좋은 문장과 사랑받는 문장 사이에서

byMinseung Kang

이 바카라은 오래전에 쓴 글을 다시 읽는 데서 시작되었다. 과거의 문장을 손보는 일은 낡은 표현을 새것으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어디까지 생각하고 어디에서 성급히 결론을 내렸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었다. 문장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지나온 시간을 심문하는 동안, 오래된 글보다 먼저 고쳐야 할 것은 글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백일장과 글짓기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그래서 남들보다 문장을 조금 잘 다룬다고 생각했고,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그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글에는 재능이 중요하며 내게도 그 재능이 얼마간 주어졌다고 여겼다. 그 자신감은 대학교 3학년 때 한 선생님을 만나면서 무너졌다. 정해진 날마다 글을 써서 내면 선생님은 조사 하나까지 고쳤다. 지적받은 대목을 고쳐 가져가면 앞서 보이지 않던 문제가 다시 드러났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이 장면은 왜 필요한가. 앞의 단락과 뒤의 단락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라. 대답하지 못하면 다시 써야 했다. 몇 줄을 고치기 위해 밤을 보냈는데도 돌아온 원고에는 새로운 표시가 가득했다. 고쳐 쓸수록 글이 나아지기보다 내가 얼마나 쓰지 못하는 사람인지 선명해지는 듯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문장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처럼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다. 더 아픈 깨달음은 따로 있었다. 글에도 쓰는 법이 있었다. 생각을 배열하는 순서가 있었고 장면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었으며, 하나의 단락이 앞뒤의 단락과 맺어야 할 관계가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 가진 생각을 보기 좋게 옮겨 적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한 문장으로 설명하지 못할 때는 대개 표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흐린 것이었다. 그럴듯한 문장을 걷어내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글도 있었다. 다시 쓰라는 말은 문장을 다듬으라는 주문이기 전에, 자신에게 생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정말 있는지 확인하라는 요구였다.


그 엄격한 규칙이 작문의 자유를 빼앗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를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형식으로 바꾸어주었다. 나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그 사이에 숨어 있던 연결고리를 뒤늦게 드러내는 방식에 매혹됐다. 멀리 떨어진 사건들이 하나의 관점 아래에서 만나면 익숙한 사실도 다른 의미를 얻었다. 다만 그 연결은 쓰는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성립해서는 안 됐다. 각각의 단락이 제 몫을 하면서도 전체의 논지를 향해 움직여야 했다. 글의 단락은 줄에 엮인 굴비처럼 따로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끈에 매여 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내가 학생들의 글과 영상기획안을 고치는 사람이 되었다. 네 시간씩 일곱 주 동안 원고를 받아 읽으며 오래전 선생님에게 들었던 질문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했다. 핵심이 무엇인가. 이 장면은 왜 필요한가. 앞의 장면과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래서 무엇이 새로운가. 다시 해오라. 그 질문들은 타인의 글뿐 아니라 내 문장을 읽는 방식이 되어 있었다. 글을 배운다는 것은 정답을 암기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쓴 문장을 쉽게 믿지 않는 태도를 익히는 일이었다.


지금도 글을 시작하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응급실로 실려 온 한 환자의 사연을 따라가다가 그를 병원 사이에서 떠돌게 한 응급의료체계로 시선을 넓힌다. 사랑에서 조건을 따지는 사람을 비난하는 대신, 조건을 보지 않고서는 관계를 지속하기 어려워진 슬롯의 빈곤을 묻는다. 병명을 얻은 뒤에야 쉴 수 있는 사람과 아파도 생계 때문에 쉴 수 없는 사람을 함께 놓고, 질병이 어떻게 바카라임과 권리를 배분하는 슬롯의 언어가 되는지 살핀다. 서로 먼 장면을 연결하는 이유는 세상이 본래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이라 불리는 일의 뒤에는 대개 그 선택을 강요하거나 제한한 구조가 숨어 있다.


그러나 내가 글을 배우는 동안 사람들이 글을 읽는 방식은 달라졌다. 나는 바카라과 잡지의 문법으로 글을 익혔지만, 글은 점차 종이를 떠나 SNS의 화면으로 옮겨갔다. 바카라에 실린 문장은 독자가 펼쳐 들기 전부터 여러 겹의 신뢰를 부여받았다. 출판사의 이름과 편집자의 선택, 작가의 이력과 바카라의 표지가 문장을 먼저 보증했다. 한 권을 고르고 값을 치른 독자는 당장 이해되지 않는 대목 앞에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앞뒤의 맥락을 살폈고, 낯선 문장에는 작가가 마련해둔 뜻이 있으리라 믿으며 한 번 더 읽었다. 종이 위의 문장은 독자의 인내를 선불로 지급받았다.


SNS의 독자는 읽기로 결심한 뒤 문장 앞에 도착하지 않는다. 사진과 광고, 뉴스와 농담이 한 화면에 뒤섞여 있고 글은 그것들과 동시에 경쟁해야 한다. 손가락이 멈추지 않으면 두 번째 문장은 존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바카라에서는 표지와 제목, 목차와 서문이 나누어 맡던 일을 SNS에서는 첫 문장 하나가 감당한다. 글은 선택된 뒤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읽히는 순간마다 다시 선택되어야 한다. 그곳은 문장이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밀려나는 장소였다.


바카라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구입한 바카라을 쌓아 사진으로 남기고, 서점에 다녀온 일을 기록하며, 읽은 바카라의 권수와 밑줄 친 구절을 화면에 올렸다. 독서는 혼자 오래 머무는 행위인 동시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이미지가 되었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때로 밉상이라고 생각했다. 바카라의 표지와 인용문을 교양의 증명서처럼 내보이며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위계를 세우는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카라을 사진으로 남기고 좋은 구절을 나누는 일이 모두 허영일 수는 없다. 문제는 독서가 한 사람을 변화시키기 전에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으로 소비될 때였다. 무엇을 새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보다 바카라을 읽었다는 사실이 중요해지고, 한 권의 복잡한 사유는 밑줄 친 한 문장으로 압축됐다.


그러나 나 역시 바카라과 문장을 SNS에 올렸다. 무엇을 읽었는지 보여주며 취향과 생각을 인정받고 싶었다. 바카라을 읽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과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불쾌해한 허영의 일부는 내 안에도 있었다.


나도 달라진 읽기의 방식에 적응하려 했다. 사람들이 이미 아는 사실은 덜어내고 판단을 앞에 두었다. 설명을 길게 쌓기보다 사건의 한가운데로 들어갔으며, 한 문장에 뒤엉킨 생각은 둘이나 셋으로 잘랐다. 첫 문장에서 시선을 붙들고 마지막 문장에서 의미를 뒤집기 위해 순서를 거듭 바꾸었다. 소리 내어 읽으며 불필요한 조사를 덜어내고 호흡이 처지는 곳에서 문장을 끊었다. 상대가 받기 좋은 패스처럼 독자가 어렵지 않게 받아낼 수 있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화제가 된 인물을 불러오고 사람들이 이미 품고 있던 감정에 논리를 보태면 반응이 왔다. 긴 망설임보다 짧은 단정이 유리했고, 의심보다 확신이 멀리 퍼졌다. 분노는 문장에 가장 손쉬운 추진력을 제공했다. 몇 줄 안에서 사람을 웃기거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면 그 어려운 일을 또 해냈다고 우쭐했다. 문장은 짧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생각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짧은 문장은 사유를 압축하는 미학인 동시에,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정적인 어조로 은폐하는 기술이 되기도 했다.


그 세계에서 문장의 완성도와 그것이 얻는 반응은 같은 기준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미 관심을 둔 사건인지, 읽는 순간 감정을 표현하기 쉬운 글인지, 독자의 정치적·문화적 취향과 같은 방향을 향하는지가 호응을 좌우했다. 가장 노골적인 조건은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다. 문장은 내용만으로 독자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글쓴이의 이름과 얼굴, 직업과 평판을 함께 데리고 갔다.


어느 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성이 쓴 몇 글자에 수백 개의 ‘좋아요’가 붙었다. 내가 오랫동안 다듬은 글보다 그의 짧은 문장이 훨씬 많은 사람에게 읽혔다. 나는 화가 났다. 문장에 들인 시간과 그것이 얻는 호응이 비례해야 한다고 믿었고, 좋은 글이라면 결국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정성껏 쓴 문장이 한 사람의 아름다운 얼굴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독자의 안목에 대한 비판이기 전에 선택받지 못한 사람의 질투였다. 나는 문장을 평가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관심의 분배가 공정하지 않다고 항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좋은 글만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글을 좋아한다. 현실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외모가 아름답거나 유명하거나, 자신이 관심을 두는 분야의 전문가이거나, 정치적으로 같은 편이라면 그 문장은 이미 호의 속에서 읽힌다. 전문 작가의 모호한 문장은 독자의 문해력을 시험하는 깊이로 해석되지만, 이름 없는 사람이 쓴 모호한 문장은 대개 글솜씨의 부족으로 판정된다. 권위는 문장의 바깥에 있으면서 문장의 일부처럼 작동한다.


그렇다고 문장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르는 기준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정확한 낱말을 고르고 문장의 호흡을 조절하며, 필요한 사실을 배치하고 단락 사이의 논리를 세우는 일에는 분명 숙련의 차이가 존재한다. 다만 문장의 완성도와 그것이 얻는 호응은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한다. 전자는 어떻게 썼는지를 묻지만 후자는 누가, 어디에서, 어떤 독자에게 썼는지를 묻는다. 좋은 글과 널리 사랑받는 글은 겹칠 수 있으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 사실 앞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두 가지 유혹에 빠진다. 하나는 대중이 원하는 감정과 문법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대중을 경멸하는 것이다. 나는 두 유혹 사이를 오갔다. 사랑받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사랑받기 위해 문장을 낮추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과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뒤섞여 있었다.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겠다는 선언에는 때때로 대중을 얻지 못한 사람의 자위가 숨어 있다. 대중의 선택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문장의 가치를 확신하는 태도에도 같은 종류의 허영이 있다.


그럼에도 독자를 버릴 수는 없었다. 글은 쓰는 사람의 안에서 시작되지만 읽는 사람에게 가 닿아야 자신과 다른 생을 얻는다. 독자가 동의하거나 반박하고, 자신의 기억을 보태거나 전혀 다른 의미를 발견할 때 문장은 저자의 소유에서 벗어난다. 반응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으면서도 반응 없이 쓸 수는 없었다. 나는 읽히지 않는 문장은 죽은 문장이라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텍스트는 독자를 만나 비로소 숨을 얻는다.


나는 잘생기지도, 유명하지도 않다. 사람들이 내 문장을 먼저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그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라는 이름을 얻으면 달라질 것 같았다. 같은 문장이라도 신춘문예 당선자라는 표지가 붙으면 독자는 한 번쯤 멈춰 읽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에서도 조금 더 오래 머물러줄 듯했다. 좋은 문장으로 권위를 얻으려 한 것이 아니라, 문장이 좋은 대접을 받도록 먼저 권위를 얻으려 한 셈이다.


그래서 신춘문예에 도전했다. 시를 써서 보냈고 어느 문학 단체로부터 당선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상을 받으려면 그들의 협회에 가입해야 했고, 가입하려면 입회원비를 내야 했다. 문학적 성취를 인정한다는 통지 뒤에 청구서가 따라붙었다. 내 시가 선택된 것인지, 회비를 낼 사람이 선택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을 얻으려고 들어간 세계에서 이름이 거래되는 장면을 만난 셈이었다.


나는 돈을 내지 않고 그 등단을 포기했다. 대신 다음 달까지 시를 열 편 더 쓰겠다고 적었다. 이름을 사는 대신 문장을 더 쓰는 쪽을 택했다. 고결한 결단이라기보다 돈을 내고 얻은 권위에 기대어 내 글을 믿고 싶지는 않다는 마지막 자존심에 가까웠다. 문장 밖의 자격을 얻으려던 시도는 실패했지만 작가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자체로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을 써서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을 지키면서 독자의 마음에 닿고,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그들의 욕망에 종속되지 않는 일은 좀처럼 양립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글쓴이가 바카라임질 수 있는 영역은 따로 있다. 무엇을 볼 것인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 사이에서 어떤 관계를 발견할 것인지, 그 발견이 통찰인지 억지인지 끝까지 의심하는 일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골라 논리를 완성하지 않는 것,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문장을 빛내는 재료로만 사용하지 않는 것, 아름다운 표현이 부정확한 판단을 용서해줄 것이라고 믿지 않는 것 또한 글쓴이의 바카라임이다. 문장은 욕망에서 시작되지만 윤리 속에서 고쳐져야 한다. 설렘이 문장을 그리고, 양심이 문장을 고친다.


지금 한 권의 바카라을 만들려는 마음에도 작가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번에는 바카라이라는 물건이 문장의 부족함을 대신 보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바카라을 냈다는 사실로 좋은 글을 썼다고 믿기보다, 왜 이 글들이 한 권 안에 있어야 하는지를 먼저 증명해야 했다. 과거의 글을 모아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당시의 내가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말한 것과 끝내 생각하지 못한 것을 현재의 자리에서 다시 검토해야 했다.


이 바카라에 묶인 글들은 대부분 그 어긋남에서 시작되었다. 개인의 선택과 그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 정의를 말하는 제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사랑의 이상과 관계를 지탱하는 조건, 기억 속의 나와 지금의 나. 어느 한쪽이 거짓이어서 생긴 모순은 아니었다. 둘 다 진실인데 함께 놓으면 좀처럼 맞물리지 않는 삶의 장면들이었다. 나는 그 틈을 성급히 봉합하기보다 왜 벌어졌는지,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싶었다. 이 괴리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이 바카라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 답을 서두르지 않기 위해 다시 쓴 기록이다.


그래서 오래된 글마다 선생님에게 배운 질문을 다시 던졌다. 무엇을 말하려는가. 이 장면은 왜 필요한가. 개인의 경험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는가. 그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과 슬롯의 구조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가. 대답할 수 없는 글은 다시 썼고, 다시 써도 대답할 수 없는 문장은 버렸다.


이 작업에서 고쳐진 것은 문장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확신 가운데 일부는 오만으로 드러났고, 정의라고 믿었던 말에는 자기변호가 섞여 있었다.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타인의 처지가 뒤늦게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글을 다시 쓴다는 것은 지나간 자신을 미화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맺는 비판적 관계였다. 나는 내가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옛 글을 불러낸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내가 어디까지 틀릴 수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읽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어서만 글을 쓰지 않는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쓴다. 머릿속에서는 그럴듯했던 믿음도 문장으로 옮기면 빈틈을 드러낸다. 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할 때는 대개 표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논리가 끊겨 있기 때문이다. 글은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기 전에 생각을 심문하는 형식이다. 쓰는 사람은 독자를 설득하기에 앞서 자신이 정말 그렇게 믿는지부터 문장 앞에서 추궁받는다.


나는 여전히 문장의 완성도와 독자의 사랑 사이에서 쓴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다. 그 마음이 없었다면 오래된 문장들을 다시 꺼내 한 권의 바카라으로 묶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모순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한쪽을 다른 쪽의 증거로 삼지 않으려 한다. 반응이 많다고 좋은 글이라 믿지 않고, 반응이 없다고 독자를 탓하지 않으려 한다. 반응은 독자의 몫이고, 문장을 끝까지 의심하는 일은 나의 몫이다. 이 바카라은 그 의심을 통과하고 남은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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