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가 완성한 ‘썅년’의 슬롯학
촬영장을 떠나려는 정희란(이하늬)을 신주애(방효린)가 붙잡는다. 영화도 싫고 자신도 싫다면서 왜 영화를 하느냐고, 그저 밥벌이냐고 묻는다. 희란은 대답 대신 주애의 뺨을 때린다. 주애는 물러서지 않는다. “선배님, 진짜 썅년이시네요.” 얼마 뒤 주애는 폴고 선생이 만든 드레스를 제멋대로 고쳐 입고 기자들 앞에 나타난다. 이번에는 희란이 주애를 보며 중얼거린다. “이 썅년 봐라.” 같은 욕이 왕복하지만 뜻은 같지 않다. 첫 번째 말은 존경했던 선배에게 얻어맞은 후배의 모욕이고, 두 번째 말은 자기 앞에 당도한 경쟁자를 알아본 선배의 탄식이다. 〈애마〉는 그 차이를 해설하지 않는다. 희란의 눈이 주애의 얼굴에서 몸으로, 다시 몸을 둘러싼 기자들의 시선으로 옮겨가는 동안 욕의 온도가 달라진다.
그런데 왜 하필 ‘썅년’일까. 여성을 낮추는 말에는 성적 문란을 죄목으로 삼는 ‘창녀’, 감정과 이성을 문제 삼는 ‘미친년’, 도덕적 악역으로 규정하는 ‘악녀’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사전에 오른 말은 ‘쌍년’이고, ‘썅년’은 발음의 타격감을 살려 적은 비표준적 표기에 가깝다. 국립국어원은 ‘상것·상놈·상년’에서 ‘쌍것·쌍놈·쌍년’ 같은 센말이 형성됐다고 설명한다. 이 계열에는 천하고 점잖지 못하다는 오래된 신분적 멸시가 배어 있다. 거기에 여자를 낮잡는 ‘년’이 붙는다. ‘놈’에는 남자아이를 귀엽게 부르는 용법도 있지만 ‘년’에는 그런 출구가 없다.
‘썅년’의 독특함은 죄목이 정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창녀’는 성을, ‘미친년’은 이성을, ‘악녀’는 도덕을 문제 삼지만 ‘썅년’은 그 여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굳이 밝히지 않는다. 행동 하나를 꾸짖기보다 사람 전체를 천하고 경우 없는 존재로 내려친다. 죄목이 비어 있으니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증오가 들어가면 모욕이 되고, 두려움이 들어가면 경계가 되며, 놀라움이 들어가면 감탄에 가까워진다. 친밀한 사이에서는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인정하는 암호처럼 쓰이기도 한다. 욕설이 애정으로 깨끗이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욕과 인정이 한 단어 안에서 불편하게 동거하는 것이다.
한국영화가 ‘썅년’을 불러낸 순간들을 나란히 놓으면 이 말의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지는지 보인다.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은 승민의 첫사랑으로 얌전히 남아주지 않았기에 ‘그 썅년’이 된다. 확인된 악행보다 남자가 이해하지 못한 시간과 선택이 그 말을 만든다. 〈도둑들〉에서 예니콜이 팹시를 두고 하는 “어마어마한 썅년 같은데”에는 적의만큼 경탄이 들어 있다. 자기 판을 뒤흔들 능력과 위험을 알아보는 말이다. 〈타짜-신의 손〉의 우사장은 돈과 사랑을 함께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유혹하고 속이며 욕한다. 이하늬에게 ‘국민 썅년’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인물 이후였다. 우사장의 욕은 미나의 젊은 몸이 자신을 밀어낼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튀어나온다. 배신했다고 여겨지는 여자, 만만치 않은 여자,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자. 서로 다른 세 영화에서 ‘썅년’은 악의 이름이라기보다 남의 기대와 자리를 흔든 여자에게 붙는 이름에 가깝다.
〈애마〉의 정희란은 그 별명에 직업의 이력을 붙인다. 희란은 당대 최고의 배우지만 더는 벗지 않겠다고 말한다. 제작자 구중호(진선규)는 그것을 몸과 노동 조건에 관한 협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배역을 줄이고 말을 잘 들을 새 얼굴을 찾는다. 희란이 거부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자기 몸을 흥행의 재료로 쓰는 방식이었지만, 구중호는 거절의 내용을 지우고 거절한 사람의 성격을 문제 삼는다. 희란은 까다롭고 고약하며 분수를 모르는 여자가 된다. 〈애마〉에서 ‘썅년’은 욕을 잘하는 여자의 별칭이기 전에 더는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말한 여성에게 돌아오는 인사고과다.
공개 오디션을 통해 신주애가 들어온다. 공장 노동자였고 쇼 무대의 백업 댄서였던 주애에게 오디션은 좀처럼 오지 않던 기회다. 그러나 구중호가 그 기회를 만드는 방식은 희란을 밀어내고 주애를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희란에게 주애는 말 잘 듣는 신인이기 전에 자기가 잃어가는 젊음과 상품성을 한꺼번에 지닌 대체자다. 주애에게 희란은 자신을 무시하고 때리는 톱스타다. 구중호는 둘의 적의를 굳이 부추길 필요조차 없다. 희란의 배역을 줄여 주애에게 주고, 한 사람의 하강을 다른 사람의 상승으로 만들면 된다. 경쟁은 두 여성의 성격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정확히 설계된 인사에서 시작된다.
그 경쟁심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드레스 장면이다. 주애는 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자기 몸에 맞게 뜯어고쳐 기자들 앞에 선다. 희란의 눈앞에는 한때 자신을 스타로 만들었으나 이제는 퇴장을 재촉하는 젊은 몸이 나타난다. 더 위협적인 것은 주애가 그 몸의 상품성을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제작자가 시키는 대로 노출하는 신인이 아니라, 무엇을 드러내야 카메라를 빼앗을 수 있는지 아는 배우다. “이 썅년 봐라”에는 자신을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질투와 판을 읽는 후배에 대한 인정이 동시에 붙어 있다. 칭찬으로 듣기에는 적의가 짙고, 모욕으로만 듣기에는 감탄이 선명하다.
구중호가 마련한 고위층 연회에서 두 사람의 서열은 갑자기 무의미해진다. 주애는 배우가 아니라 접대할 몸으로 취급되고, 성적 요구를 거부하자 희란은 그를 데리고 빠져나온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톱스타와 이제 막 배역을 얻은 신인은 촬영장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권력자의 방 안에서는 같은 용도로 분류된다. 희란이 주애에게서 발견한 것은 착한 후배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다. 주애가 당하는 모욕을 이미 알고 있기에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애마〉가 이 연대를 구원으로 과장하지는 않는다. 같은 연회에서 배우 지망생 미나는 약물을 강제로 흡입하고 죽는다. 희란은 주애 한 사람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지만 그 판을 멈추지는 못했다. 한 사람의 용기가 모두를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 스타의 힘조차 자기 손이 닿는 한 사람을 구하는 데 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미나의 죽음에 남는다. 여기서 영화의 질문은 ‘왜 더 구하지 못했는가’보다 ‘왜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리에 남아야 했는가’에 가깝다. 주애가 거부하고 희란이 데리고 나간 뒤에도 접대를 필요로 하는 권력과 그 요구에 여성을 공급하는 영화사는 그대로다. 거절의 비용은 사라지지 않고 더 약한 사람에게 이동한다. 〈애마〉가 보여주는 차별의 미시성은 거대한 음모보다 이런 이동에 있다. 누가 싫다고 말했을 때 요구가 철회되는 대신, 더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을 찾는 것.
영화 속 영화가 다시 쓰이는 대목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희란이 연기한 에리카는 주애가 연기한 애마에게 폭력 앞에서 수치심으로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을 지키라고 말한다. 애초에 여성의 몸을 전시하려고 만든 영화 안에 여성의 몸을 지키는 문장이 들어간다. 주애도 노출을 수동적으로 견디지 않고 촬영 아이디어를 내며 장면의 의미를 바꾸려 한다. 희란과 주애, 곽인우가 손을 보탠 〈애마부인〉은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지는 못해도 적어도 누구의 눈으로 그 몸을 볼 것인지를 다투는 영화가 된다.
구중호는 그들이 만든 맥락을 최종 편집에서 지워버린다. 여성이 자기 몸에 부여한 말과 의도는 잘리고, 남성 관객이 소비하기 쉬운 몸만 남는다. 문제는 노출 장면의 존재만이 아니다. 희란과 주애가 그 장면을 통해 하려던 말을 제작자가 자기 뜻대로 바꾸었다는 데 있다. 몸은 촬영에 참여했지만 의미를 결정하는 자리에서는 다시 쫓겨난다. 그러므로 희란이 필름을 태우려는 행동은 자기 출연작을 부정하는 돌발행동이 아니다. 구중호가 완성한 영화에 자기 얼굴과 몸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마지막 거절이다.
주애가 그 방화에 합류하면서 두 사람은 비로소 같은 편이 된다. 희란은 자신을 때리고 모욕한 적이지만, 모멸의 자리에서 자신을 꺼내준 사람이기도 하다. 이제 그 사람이 남이 편집한 자기 모습과 싸우고 있다. 두 사람을 묶는 것은 호감보다 빚이고, 화해보다 목격이다. 경쟁이 오해였다고 지우지 않고 서로에게 가한 폭력까지 남겨둔 채 공동 전선을 만든다는 점에서 〈애마〉의 연대는 쉽게 미화되지 않는다.
“더 이 악물고 썅년 해. 그래야 버텨.” 희란이 주애에게 건네는 말은 다정해서 잔인하다. 선배가 후배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안전한 현장이나 공정한 계약이 아니라 더 독해지는 요령뿐이기 때문이다. 희란은 ‘썅년’이라는 판정을 뒤집어 생존 기술로 건넨다. 그러나 그 말이 멋진 훈장이 되는 순간 현실의 바카라임은 다시 여성에게 돌아간다. 살아남지 못하면 충분히 독하지 못했던 사람이 되고, 살아남으면 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시간은 성공담 속에서 지워진다. 이 대사는 여성에게 강해지라고 격려하는 문장이면서, 평범한 거절 하나를 지키기 위해 왜 그토록 강해져야 하는지를 묻는 문장이다.
마지막에 희란은 시상식에서 영화계의 비리를 폭로하고, 주애는 말을 타고 그에게 돌아온다. 두 사람은 광화문을 역주행한다. 이해영 감독은 1982년 〈애마부인〉의 벗은 여성이 말을 타던 이미지를 반대로 뒤집고 싶었다고 밝혔다. 과거의 말 위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 관객에게 전시됐지만, 〈애마〉의 말 위에서 두 여성은 자기 방향을 정한다. 전시되던 몸이 이동하는 몸이 되고, 남이 편집한 영화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자기 장면의 끝을 선택한다. 중요한 것은 두 ‘썅년’이 절친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서로를 향하던 적의가 자신들을 대체 가능한 몸으로 만든 제작자를 향해 돌아섰다는 사실이다.
이 결말에 이르면 이하늬의 필모그래피도 한 줄로 이어진다. 〈타짜-신의 손〉의 우사장은 욕망과 질투를 숨기지 않아 ‘국민 썅년’이 됐고, 〈열혈사제〉의 박경선은 살아남으려고 권력에 붙었다가 그 권력의 작동법을 되돌려 썼다. 〈원 더 우먼〉의 조연주는 얌전한 재벌가 며느리의 자리를 욕설과 말대꾸로 깨뜨렸고, 〈킬링 로맨스〉의 황여래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스타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정희란은 그 얼굴들을 한데 모은다. 욕망하고, 타협하고, 후배를 질투하고, 그 후배를 때리며, 끝내 자신이 버틴 판을 배반하는 여자다. 이하늬가 확장해온 것은 ‘센 여자’의 목록이 아니라 여성이 결함을 지우지 않고도 이야기의 중심에 남을 수 있는 범위였다.
그래서 〈애마〉의 ‘썅년’은 끝내 하나의 뜻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주애가 희란에게 던질 때는 모욕이고, 희란이 주애를 바라보며 뱉을 때는 질투와 감탄이며, 살아남으라는 당부 속에서는 고약한 애정이다. 달라지는 것은 욕설의 뜻만이 아니라 욕설이 향하는 곳이다. 처음에는 두 여성이 서로를 겨누지만 마지막에는 자신들을 벗기고, 바꾸고, 편집한 사람들의 판을 거슬러 달린다. 이하늬가 ‘국민 썅년’의 반열에 오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욕먹을 만한 여자를 실감나게 연기해서가 아니라, 누가 여자를 ‘썅년’으로 만들며 그 이름으로 무엇을 얻는지를 끝까지 묻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적지 않은 여성들이 순응하면 누군가의 도구가 되고 거절하면 ‘썅년’으로 불리는 양자택일 앞에 선다면, 이하늬의 ‘썅년’들이 끝내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왜 여성은 그 어느 쪽도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