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미녀는 맞춤법을 틀렸다

9만 원짜리 문자에서 시작된 안부 이야기

byMinseung Kang

메신저가 새로 생기면 기존의 메신저는 기능보다 먼저 예의를 얻는다. 현재 시점에서 카지노톡은 문자메시지보다 조금 경박해 보이고, 문자메시지는 이메일보다, 이메일은 손편지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같은 문장인데도 카지노톡으로 보내면 생각나는 대로 적은 말 같고, 이메일로 보내면 한 번쯤 고쳐 쓴 말 같으며, 손편지로 쓰면 차마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말이 된다. 종이를 고르고, 손으로 글씨를 쓰고, 봉투에 넣어 주소를 적은 뒤 우체통까지 갔을 사람의 시간이 문장과 함께 도착하기 때문이다. 말의 무게는 내용으로만 정해지지 않는다. 그 말을 건네기 위해 감수한 불편의 크기도 우리는 마음으로 읽는다.


얼마 전, 모르는 번호로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발신자는 자신이 스무 살을 조금 넘긴 미모의 여성이라고 소개했다. 큰 키에 비해 몸무게는 가벼웠다. 자신이 얼마나 날씬하고 매력적인지를 독자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도록 신체 조건을 차례로 적어놓았다. 여기까지라면 흔한 소개였겠지만 문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될 신체적 특징과 은밀한 장점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언제 만날 수 있는지, 만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모든 친절을 누리는 데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도 빠뜨리지 않았다. 가격은 9만 원이었다.


문자의 흐름은 제법 논리적이었다.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다음으로 상대가 얻게 될 효용을 설명한 뒤, 마지막에는 결정을 재촉하지 않고 물러났다. 답장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감정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불특정 다수에게 보냈을 문장이 분명한데도 마치 나 한 사람에게만 은밀히 자신을 내놓는 것처럼 쓰여 있었다. 내용은 노골적이었지만 태도는 공손했고, 목적은 불순했지만 구성은 웬만한 기획안보다 치밀했다.


나는 응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 문자를 끝까지 읽었다. 그가 제시한 키와 몸무게가 실제로 조화를 이루는지 잠시 가늠했고, 사진도 없이 자신의 미모를 주장하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했다. 9만 원이라는 가격이 시간당 요금인지 전체 비용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자기소개에는 상당한 공을 들이면서 정작 거래 조건에는 모호한 구석을 남겨둔 점이 기획상의 결함처럼 보였다. 보내는 사람은 나의 욕망을 상상했고, 나는 그의 문장을 심사했다. 그는 나를 잠재적 고객으로 대했고 나는 그를 신원 미상의 카피라이터로 평가했다.


그 문자를 보낸 쪽은 나를 몰랐다. 내 이름도, 나이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을 자세히 설명했고, 내가 어떤 말에 눈길을 멈출지 고민했으며, 답장이 오지 않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목적이 돈이라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목적이 돈이라는 이유로 거기에 들인 수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에는 진심이 없지만 진심의 형식을 익히는 데에는 누구보다 부지런하다.


그러다 나는 맞춤법이 틀린 한 대목에서 마음이 짜게 식었다. 나에게 문자로 뭔가를 요구하고자 했다면 최소한, 보내기 전에 맞춤법 검사기라도 한 번 돌려봤어야 하는 것 아닐까. 더구나 한 사람에게만 보내는 연서도 아니었다. 같은 문장으로 여러 사람을 설득해야 했다면 검토에 드는 수고는 한 번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 한 번의 수고조차 들이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미모와 서비스에는 어떻게 이토록 자신만만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어떤 지적 수준 역시 상대를 판단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철자 하나로 상대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일이 온당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아직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게서는 그가 보내온 문장 외에 판단할 만한 것이 없었다. 소개된 미모는 확인할 수 없고 큰 키와 가벼운 몸무게도 주장에 불과했다. 반면 틀린 철자만큼은 화면 위에 명백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하나를 근거로 발신자를 뭔가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듯한 스무 살 여성으로 성급히 상상했다. 결국 스무 살을 조금 넘긴 미모의 여성이 9만 원에 만나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오탈자 하나를 이기지 못했다. 욕망에도 맞춤법은 중요했다.


자본의 성실함은 거리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버스의 앞과 옆과 뒤는 서로 다른 방향의 사람들을 맡는다. 앞면의 광고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을 바라보고, 옆면은 인도를 걷거나 옆 차선을 지나는 사람을 따라간다. 뒷면은 신호에 걸려 버스 뒤에 멈춘 자동차의 운전자를 상대한다. 출입문에도 광고가 붙는다. 승객이 타고 내릴 때마다 문짝과 함께 접혔다가, 문이 닫히면 잠시 두 조각 났던 얼굴과 문장이 다시 온전해진다. 사람이 드나들라고 만든 문도 자본에게는 비어 있는 면적이다.


광고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몇 분을 승강장 안전문 앞에서 함께 보내고, 엘리베이터에서는 층수를 확인하고 돌아선 사람의 눈높이를 먼저 차지한다. 휴대전화를 켜면 화면을 열기도 전에 알림으로 도착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몇 초까지 누군가를 설득할 시간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내 이름은 몰라도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지는 짐작한다. 늙을까 봐 보험을 권하고, 아플까 봐 건강식품을 챙기며, 돈이 부족할까 봐 대출 한도를 알아봐준다. 외로울까 봐 스무 살의 미모의 여성까지 소개한다. 광고가 나를 부르는 말을 듣고 있으면 웬만한 부모형제보다 나를 더 걱정하고 아끼는 것 같다. 다만 그 모든 걱정에는 결제창이 딸려 있다. 광고가 다정해진 것은 자본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다정한 말에 인간이 잠시 멈춘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의 인사는 오히려 광고를 닮아가고 있다. 지금처럼 상대의 취향과 동선을 연구하는 광고가 아니다. 수신자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같은 문장을 불특정 다수에게 살포하던 예전의 광고 형식에 가깝다. 이를테면 연말연시가 되면 한동안 연락이 없던 사람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도착한다. 지난 한 해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하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뜻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평소에는 쓰지 않던 한자어와 정중한 표현이 줄을 잇는다. 맞춤법도 틀린 데가 없다. 내용만 보면 오랫동안 나를 생각한 사람이 마음을 다해 쓴 편지 같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 문장에는 내 이름이 없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도, 그 뒤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묻는 말도 없다. 내 이름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거나 수신자를 백 명쯤 더 늘려도 내용은 조금도 어색해지지 않는다. 카지노톡이 생긴 뒤에는 이런 상황이 더 심해졌다. 수십 명, 때로는 수백 명이 모여 있는 단체대화방에 한 번만 메시지를 보내면 된다. 발신자의 이름은 대화방 안의 모두에게 표시되고, 여기저기서 답례의 이모티콘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뒤따른다. 한 번의 전송으로 수십 명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셈이다. 심지어 그 문장을 직접 쓸 필요조차 없다.

수능 전날이면 SNS에도 응원 영상이 쏟아진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은 두 주먹을 쥐거나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며 “수험생 여러분 모두 파이팅”이라고 외친다. 내일이 수능인데 그날 밤 그 영상을 찾아보고 있을 수험생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설령 본다고 해도 그 말로 시험 문제가 쉬워지거나 공부하지 못한 시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수능은 점수로 사람을 나누기 위해 설계된 시험이므로 응시자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없다. 모두 잘되라는 말은 처음부터 실현될 수 없는 응원이다.


그런데도 영상은 만들어진다. 수험생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지만 누가 응원했는지는 남기 때문이다. 화면 속 사람은 자신이 수험생을 잊지 않았고, 청춘의 노력을 응원하며, 중요한 날에 침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광고가 소비자를 위하는 말로 상품을 알린다면, 어떤 인사는 상대를 위하는 말로 발신자를 알린다. “당신을 생각합니다”라는 문장 안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사람은 때로 당신이 아니라 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누군가 의례적으로 “잘 지내시죠?”라고 물었을 때 “아니요. 저는 잘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질문을 보낸 사람은 당황할 것이다. 그는 내 근황을 자세히 알고 싶어서 물은 것이 아니라 “네, 덕분에 잘 지냅니다”라는 예정된 답을 받고 대화를 마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 게임을 잃었거나 오래 아팠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돌아오면 인사는 갑자기 바카라임이 된다. 인사 하나 건넸을 뿐인데 감당해야 할 사람이 생긴다.


물론, 그렇다고 “아니요, 잘 지내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할 사람도 거의 없다. 상대가 건넨 말이 진짜 질문이 아니라 의례적인 인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대답하는 순간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자신의 긴 사정을 풀어놓아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 그러니까, 질문은 왔지만 대답은 할 수 없다. 한쪽은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물었고, 다른 한쪽은 말하고 싶은 것을 숨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정을 모른 채 무사히 안부를 마친다.


그래서 나는 명절이나 연말연시에는 굳이 인사를 보내지 않는다. 수십, 수백 개의 인사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동안 내가 어렵게 고른 문장도 그 홍수에 휩쓸릴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연락하지 않은 게으름을 매번 이런 소신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 다만 보낼 거라면 그 사람의 이름을 쓰고 싶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하나쯤은 떠올리고, 예상과 다른 대답이 돌아올 자리도 조금은 남겨두고 싶다.


그날의 스무 살 여성은 철자를 틀렸지만 나를 움직이려는 목적만큼은 분명했다. 그 문자는 나를 모르면서도 나를 유혹하려 했고, 수많은 단체 인사는 나를 알면서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나는 전자의 문자를 지우고 발신자를 차단했다. 후자에는 대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어느 쪽도 나를 향한 말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