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나는 아직 여기까지밖에 못 했어요

먼저 도착한 어른과 뒤에 오는 사람의 시간

byMinseung Kang

“쉽죠? 우리 어린이 여러분은 금방 따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안녕.”


브라운관 속 김영만 아저씨는 벌써 인사를 하고 있었다. 화면과 손에 든 색종이를 번갈아 보느라 나는 이제 겨우 두세 번 접었을 뿐이었다. 아저씨가 한쪽 모서리를 반대편에 가져다 댈 때마다 어느 모서리를 말하는지 찾느라 한 박자씩 늦었다. 방향을 알아낸 뒤 손가락으로 접힌 자리를 누르고 고개를 들면 화면 속 색종이는 이미 다른 모양이 돼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텔레비전은 내 사정을 몰랐다.


주변을 둘러보면 벌써 완성한 아이도 있었다. 어떤 아이는 아저씨의 손을 잘도 따라갔고, 어떤 아이는 접는 방법을 이미 안다는 듯 화면에서 먼저 눈을 뗐다. 내 손에는 같은 모양으로 몇 번 접히다 만 색종이만 쌓였다. 방송이 끝나면 나는 그것들을 손안에서 조용히 구겼다. 색종이가 아까워 다시 펴보기도 했지만 한번 잘못 눌린 자국은 다른 방향으로 접을 때마다 불쑥 나타났다.


김영만 아저씨는 1988년 KBS 〈TV유치원 하나둘셋〉에 출연하기 시작해 〈혼자서도 잘해요〉와 EBS 〈딩동댕 유치원〉 등에서 오랫동안 종이접기를 가르쳤다. 그에게는 색종이 한 장과 가위, 풀만 있으면 됐다. 네모난 종이는 몇 번 접고 자르는 사이 꽃과 새와 장난감으로 변했다. 그의 손에서는 모든 과정이 쉬워 보였다. 문제는 늘 내 손에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내 적성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레고에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배우는 것이 빠른 아이가 아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도 한글을 다 익히지 못했고 구구단도 또래보다 늦게 외웠다. 어머니는 훗날 그때에는 내가 이른바 ‘저능아’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나는 11월생이었다. 같은 해 3월에 태어난 아이와는 여덟 달가량 차이가 났다. 어른에게 여덟 달은 별 차이가 아니지만 어린 아이의 언어와 운동 능력에서는 작지 않은 시간이다. 같은 학년에서 상대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입학 초기의 학업성취도와 자기효능감에서 불리할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상대연령 효과가 내 모든 서투름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발달 속도가 다른 아이들을 같은 출발선에 세운 뒤 먼저 해낸 아이를 기준으로 나머지를 평가하는 일이 언제나 공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무엇이든 조금 늦게 익혔다. 그러나 어른들은 늦는 것과 못하는 것을 자주 구별하지 않았다. 잘하지 못하면 더 연습하라고 했고, 그래도 늦으면 집중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시간이 어른에게는 게으름이나 불성실로 보였다. 서투름은 아직 배우는 중이라는 상태가 아니라 빨리 고쳐야 할 결함으로 취급됐다. 특히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가 내 서투름 앞에서 보인 실망과 분노는 맏이에게 걸었던 기대만큼 컸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가 용돈으로 준 5천 원짜리 지폐를 귀갓길에 잃어버린 적이 있다. 집에 도착해 주머니를 뒤져보고서야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대로 말하자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나가서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울면서 방금 걸어온 길을 되짚었다. 바닥만 내려다보며 학교까지 돌아갔고, 길에서 만난 사람과 가게 주인에게 돈 5천 원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눈물과 콧물이 뒤섞였지만 돈은 나오지 않았다. 현금이었으므로 누군가 이미 주워갔다면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잃어버린 돈을 찾는 방법보다 실수한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두려운지를 먼저 배웠다.


중학교의 합주 실기시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연주하는 시험이었다. 악기를 잘 다루지 못했던 나는 연주를 잘하는 아이와 짝을 이루어 이른바 묻어가려 했다. 시험이 끝나고 음악 교사가 교실을 나가려고 하기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로 그때, 교사는 나가다 멈춰서서 교실 문에 어깨를 반쯤 걸친 채 반 친구 오십여 명이 보는 앞에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만 다시 봐.”


흡사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 강마에가 내뱉던 ‘똥.덩.어.리’ 같았다. 한 음씩 틀린 부분을 알려주거나 다시 연습할 시간을 주는 대신, 교사는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부족했는지를 공개했다. 잘하는 아이에게 기대어 넘어가려 했던 내 선택은 떳떳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잘못이 한 아이를 교실 한가운데 세워 망신을 줄 이유까지 되지는 않았다. 그날의 실기시험은 내 연주 능력을 정확히 평가했을지 모르지만, 내가 이후에도 음악을 배우고 싶게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 나는 지금도 제대로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력만 놓고 보면 나는 이미 꽤 멀리 와 있었다. 한글을 익혔고 구구단을 외웠으며 수능에서는 외국어영역에서 만점을, 언어영역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서울 소재 명문 사립대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한국방송공사에 그해 최연소 TV프로듀서로 입사했다. 어린 시절의 속도만으로 한 사람의 가능성을 판단했다면 설명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사람은 늦게 배우기도 하고, 늦게 배운 것을 오래 사용하기도 한다.


입사한 뒤에는 탐사와 교양 프로그램을 만들며 경력을 쌓았다. 맡은 일에서 나름의 성과를 냈고, 어느덧 방송을 만드는 방법을 후배들에게 가르칠 자리까지 왔다. 2014년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에서 후배들을 대상으로 영상제작 강의를 맡았다. 일주일에 네 시간씩 모두 일곱 차례 진행한 수업이었다. 첫 시간에는 설정보다 구현이 중요하고, 구현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이라고 말했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영상으로 옮기는 데 필요한 자투리 기술뿐이라고 생각했다.


매주 짧은 영상을 만드는 과제를 내고, 학생들이 완성해온 작품을 함께 보며 토론했다. ‘7시간’이라는 제시어로 30초짜리 영상을 만들게 했고, ‘연애’를 주제로 1분짜리 작품을 주문했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개봉했을 때에는 제목을 그대로 다음 과제의 제시어로 내놓았다. 제한된 시간 안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촬영한 장면을 늘어놓는 것과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가르치고 싶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미숙함을 견디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기획의 중심이 보이지 않으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고 몰아붙였고, 문장이 흐리면 한 문장으로 다시 말해보라고 했다. 주인공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장면은 왜 필요한지, 이것이 정말 영상으로 성립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수정해오라는 말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수업은 재미있지만 선생님은 무섭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업이 이어질수록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학생들에게는 결과보다 관점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관점이 제 모습을 갖출 때까지 나는 기다리지 못했다. 그들이 겨우 두세 번 접었을 때 나는 완성된 모양을 들이밀며 왜 아직 여기까지 오지 못했느냐고 다그치듯 캐물었다.


가르치는 일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를 드러냈다. 나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던 어른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내 삶으로 증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과 다른 사람을 기다려주는 어른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느린 아이였다는 기억은 오히려 나를 더 가혹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도 부족했던 시절을 노력으로 넘어왔다고 믿었기에 학생들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내 기준에 이르지 못하면 아직 배우는 중이라고 보기보다 노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어린 시절 나를 몰아세웠던 어른들의 논리를 나도 모르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가 두 딸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2015년 7월, 김영만 아저씨가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나타났다. 20여 년 전 텔레비전 앞에서 그의 손을 따라가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의 얼굴로 인터넷 생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는 어려워하는 것이 많았지만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잘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채팅창에는 자신도 그때 제대로 따라 하지 못했다는 고백이 쏟아졌다. 나만 뒤처진 줄 알았는데 같은 자리에서 나처럼 조용히 색종이를 구겼던 아이들이 온 나라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김영만 아저씨는 어른이 된 시청자들을 예전처럼 ‘코딱지들’이라고 불렀다. 코를 흘리고 눈을 비비던 코딱지들이 이렇게 컸다며 대견해했다. 색종이를 접는 손을 잠시 내려놓고 슬롯생활도 열심히 하라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날 시청자들이 울었던 것은 종이접기가 반가워서만은 아니었다. 취업과 결혼, 출산과 양육, 생계와 노후를 각자 감당하는 동안 아무도 그들에게 이렇게 잘 자라주어 고맙다고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색종이를 잠시 내려놓고 우리의 등을 다독였다.


어린 시절의 방송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화면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흘러갔고, 따라가지 못한 나는 내 손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20여 년 뒤 다시 나타난 그는 방송의 속도를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그때 미처 따라오지 못한 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봐주었다. 내가 그의 말에서 받은 위로는 이제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격려보다, 그동안 잘하지 못했던 것이 모두 네 잘못은 아니라는 뒤늦은 인정에 가까웠다.


나는 몇 가지 일을 남보다 잘하게 되었지만 잘하는 일과 잘 사는 일은 같지 않았다. 일에서는 잘못된 부분을 빠르게 찾아내면서도 사람의 마음 앞에서는 판단을 서둘렀고, 타인의 서투름을 기다리지 못하면서 정작 내 잘못을 인정하고 태도를 바꾸는 데에는 늦었다. 설명이 충분하면 상대도 나를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은 말이 관계 안에서는 가장 잔인한 말이 될 수도 있었다. 2026년 봄, 나는 이혼했다.


어린 시절 내가 만난 어른들은 대체로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글을 알고, 구구단을 외우고, 악기를 다룰 줄 알았으며, 돈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나를 돌아보며 왜 아직 거기 있느냐고 물었다. 어른이란 아이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고, 아이가 제시간에 도착했는지를 판정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어른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한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아니라 뒤에 오는 사람의 시간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사람. 잘못을 알아보되 그것을 한 사람의 한계로 확정하지 않는 사람. 자신이 아는 방법을 건네면서도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요하지 않는 사람. 기다린다는 것은 잘못을 모른 척하거나 기준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을 너무 일찍 끝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일이다.


나는 이만큼 자랐지만 아직 그런 어른이 되지는 못했다. 남들은 벌써 완성한 것 같은데 내 손에는 몇 번 접다 만 종이가 남아 있다. 예전에는 잘못된 선이 보이면 종이를 구겨버렸다. 이제는 그 선을 없애려 하기보다 어디서부터 다시 펼칠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미 생긴 자국은 지워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만들 수 있는 모양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저씨, 나는 ‘아직도’ 여기까지밖에 못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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