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를 견디는 일

〈HOPE〉, 이해보다 판단이 먼저 도착하는 세계

byMinseung Kang

어떤 작품이 왜 좋지 않은지를 말하는 것보다 왜 좋은지를 설명하는 일이 정확히 57.2배쯤 어렵다. 물론 산출 근거는 없다. 다만 나쁜 작품이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한 문장이면 충분하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설득하려면 장면을 다시 보고 그 장면이 앞뒤의 장면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설명해야 한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비슷하다. 좋지 않은 소문은 굳이 밀어주지 않아도 멀리 가지만 미담은 정성껏 옮겨도 가까운 곳에서 자주 멈춘다.


부정적인 이야기는 대체로 서사적이다. 잘못한 사람과 피해 본 사람이 있고, 폭로와 응징이 뒤따른다. 누군가의 실수나 결함을 비판하는 사람은 그 순간 정의롭고 명석한 위치에 설 수도 있다. 반면 무엇이 좋았는지를 설명하려면 감탄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놓친 부분과 잘못 본 대목까지 드러내면서 취향의 근거를 내놓아야 한다. 콘텐츠를 업으로 삼아 자극적인 제목과 단정적인 평가를 하루에도 수없이 접하다 보면, 세상에 나쁜 것이 그렇게 많은 게 아니라 나쁜 이야기가 유통되기에 훨씬 좋은 형식을 갖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나홍진의 〈HOPE〉도 그런 시대의 복판에서 거대한 담론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이 작품을 하나의 완결된 영화로 판단하기가 아직 어렵다. 지금 공개된 이야기만 놓고 보면 더 큰 서사의 프롤로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사적 완결성이 부족하고 일부 인물과 대사, 시각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도 이해한다. 그렇다고 그 결함만으로 영화를 곧바로 ‘쓰레기’나 ‘비추천’이라는 한 단어에 가두고 싶지는 않다. 나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았고, 외계인의 출현을 둘러싼 긴장과 해방을 경험했으며, 카메라와 음악이 만들어낸 순간들을 즐겼다. 영화는 수학 공식이 아니다. 빈틈이 있다는 사실과 그 영화를 통해 얻은 경험이 좋았다는 사실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나는 재밌었다. 충분히.


영화의 시작은 침략보다 오인에 가깝다. 낯선 곳에 도착한 거대한 존재가 움직이는 과정에서 사람과 마을에 피해를 입히고, 인간은 그것을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한쪽에는 의도하지 않은 충돌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사람이 죽고 삶의 터전이 무너진 명백한 결과가 있다. 의도와 결과가 어긋난 자리에서 공포는 가장 나쁜 가능성을 먼저 선택한다.


숲에서 성기(조인성)가 더는 저항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도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벤더)는 그를 즉시 죽이지 않고 무언가를 말한다. 처음에는 자막이 붙지 않았던 그 말을 두고 개봉 뒤 인사나 자기소개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지만, 나홍진 감독은 이후 ‘미천한 종자’라는 뜻이었다고 밝혔다. 화해의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침략자의 선전포고로만 정리하기도 어렵다. 마베이요는 인간을 낮춰 보면서도 성기를 살려두었고, 인간은 그의 언어를 모르는 채 행동만으로 의도를 판단한다.


〈HOPE〉는 외계인의 언어를 끝내 감추는 영화가 아니다. 후반부에는 자막을 열어 그들의 사정과 목적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번역의 거부가 아니라 번역의 지연이다. 관객은 먼저 인간의 자리에서 외계인을 보고 두려워하며, 그 판단이 굳어진 뒤에야 다른 쪽의 말을 듣는다. 초반과 후반의 외계인은 같은 존재지만 언어가 주어지자 전혀 다른 얼굴로 보인다. 번역은 정보를 보충하는 장치가 아니라 이미 내린 판단을 되돌아보게 하는 장치가 된다.


나홍진 감독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도 악의가 없고 저마다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 있다고 말했다. 악의가 없다는 말이 모든 행동을 면바카라하지는 않는다. 선한 의도에서도 사람이 죽을 수 있고 오해에서 시작된 폭력도 실제 피해를 남긴다. 다만 비극의 원인이 악인의 존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은 상대의 적의를 확인한 뒤에만 싸우는 존재가 아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싸우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는 음모가 되고, 설명되지 않은 행동은 공격이 되며, 낯선 존재는 적이 된다. 공포는 정보가 부족한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다.


캐스린 비글로의 넷플릭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그 역설을 거의 실험처럼 펼쳐 보인다. 발사 주체를 알 수 없는 대륙간탄도미사일 한 발이 미국을 향하고, 정부와 군 관계자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18분뿐이다. 그것이 어느 국가의 공격인지, 테러집단의 소행인지, 잠수함 지휘관의 독단인지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발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미국 측 관계자는 그 말을 믿지만, 믿음은 대통령의 결정을 뒷받침할 증거가 되지 못한다. 미사일이 도착하기 전에 보복 여부와 대상을 정해야 하는 체계 안에서는 모른다는 사실이 판단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파괴적인 선택을 서두르게 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람들은 무능하거나 호전적인 광인들이 아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훈련받은 절차를 수행하고, 가능성을 검토하며, 세계가 파괴되지 않을 명분을 찾으려 애쓴다. 그럼에도 출처를 확인할 시간보다 대응을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 먼저 끝난다. 〈HOPE〉에서 번역되지 않은 외계인의 말이 인간의 공포 속에서 공격의 신호로 바뀌었다면,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에서는 발사자를 알 수 없는 미사일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적국의 의도로 번역된다. 두 영화에서 미지는 평온한 공백으로 남지 않는다. 파국에 대비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요구가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그 합리성들이 서로 맞물려 실제 파국을 준비한다.


이 영화의 구조는 극장 밖에서 뜻밖의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이동진 평론가는 〈HOPE〉에 별 네 개를 주고 “기괴한 난장판 속에서 대담하게 질주하는, 영화 전체가 거대한 크레센도”라고 평했다. 영화에 실망한 일부 관객은 그 평가가 어떤 장면과 근거에서 나왔는지를 따지는 대신 나홍진 감독과의 친분, 한국영화에 대한 편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의심했다. 이동진은 결국 감독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사적으로 커피 한 잔 마신 적도 없으며, 경제적 이유나 ‘슬롯생활’ 때문에 호평할 까닭도 없다고 직접 해명해야 했다.


문제는 관객이 평론가와 다른 평가를 내렸다는 데 있지 않다. 이동진의 별 네 개가 정답인 것도 아니고, 다수 관객의 혹평이 틀린 것도 아니다. 영화의 서사와 연출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호평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배후의 친분과 거래를 상상하는 순간 감상은 사실에 관한 혐의로 바뀐다. 영화 속 인간이 외계인의 알 수 없는 행동을 적의로 번역했듯, 영화 밖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호평이 유착의 결과로 번역됐다. 상대의 판단이 형성된 경로를 살피기 전에 가장 의심스러운 사정을 먼저 완성했다는 점에서 두 장면은 닮아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나는 관객의 태도만을 탓할 수 없었다. 입사하기 전 글공부를 하던 시절, 『씨네21』의 영화 리뷰를 읽으며 자주 분개했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어렵게 써야 같은 말도 우아해 보이는 것일까. 의사가 처방전을 알아볼 수 없게 휘갈겨 쓰듯 평론가들도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고 일부러 난해한 언어를 쓰는 것 같았다. 정녕 깨달은 사람이라면 다섯 살 아이도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한다고 저항했다. 그러나 그 분노 아래에는 다른 감정이 눌려 있었다. 우리말 말고는 제대로 구사하는 언어도 없던 나는 그들의 세계에 끝내 초대받지 못할 것 같았고, 그들만큼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도 저런 문장을 쓰고 싶었다.


2008년에 쓴 〈미스트〉 리뷰는 그 시절의 내가 영화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프랭크 다라본트가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을 영화화한 〈미스트〉는 정체불명의 안개가 마을을 덮치면서 슈퍼마켓에 고립된 주민들의 이야기다. 안개 속에는 괴생명체가 돌아다니지만, 영화가 오래 바라보는 것은 바깥의 괴물보다 안에서 공포에 잠식되는 사람들이다. 불확실성이 길어질수록 이성적인 판단은 힘을 잃고, 종교적 광신과 집단의 적대가 질서를 대신한다. 다라본트는 원작과 다른 참혹한 결말까지 밀어붙이며 인간의 희망이 얼마나 짧은 순간에 절망으로 뒤집힐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전혀 다른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안개와 함께 괴수가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기본 설정과 촉수, 거대한 곤충 같은 괴물의 디테일은 인정하면서도 괴물의 출현 이유가 몇 마디 대사로 처리되고 퇴장도 갑작스럽다며 내러티브가 약하다고 비판했다. 괴수보다 괴수의 등장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심리가 주제일 수 있다고 짐작하고도, 그것은 관객 개인의 재해석일 뿐이니 감독이 자신의 메시지를 바카라임졌어야 한다고 썼다. “영화 〈미스트〉는 제목 그대로 안개 속에서 스스로 길을 잃은 듯 보인다.” 모호한 결말을 관객에게 채우게 하는 것은 무바카라임하다며 글을 이렇게 끝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 영화보다 내가 길을 잃었다는 편이 정확해 보인다. 〈미스트〉의 결말은 모호하기는커녕 잔인할 만큼 단호하다. 영화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것은 괴물의 생태와 세계의 사후 처리였고, 끝까지 밀어붙인 것은 공포에 갇힌 인간의 선택이었다. 나는 영화가 대답하려는 질문보다 내가 답을 얻고 싶은 질문을 앞세운 뒤, 작품이 거기에 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바카라임하다고 판정했다. 작품의 여백과 서사의 결함을 구분해야 한다는 당시의 원칙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원칙을 적용하려면 먼저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충분히 보아야 했다.


지금 〈HOPE〉를 향해 쏟아지는 일부 반응에서 그때의 내 얼굴이 보인다. 이야기가 충분히 닫히지 않았다는 불만, 자신이 알고 싶었던 것을 영화가 설명하지 않았다는 분노,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작품의 무능이나 창작자의 오만으로 곧장 바꾸는 태도까지 닮았다. 당시의 나는 〈미스트〉를 대충 본 관객이 아니었다. 촉수와 곤충의 생김새를 기억했고 인물들의 심리 변화가 주제일 가능성도 짚었다. 문제는 보지 못한 데 있지 않았다. 내가 중요하다고 정한 정보에 영화가 충분히 답하지 않자, 이미 본 것들까지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데 있었다. 지금의 일부 관객 역시 〈HOPE〉의 결함을 정확히 짚으면서도 그 결함이 영화의 다른 성취까지 모두 무효로 만든다고 믿는다. 정확한 지적이 언제나 온전한 판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해 김혜리의 『영화를 멈추다』를 읽은 경험은 영화에 관한 판단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처음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바카라은 서른 편의 한국영화에서 서른 개의 장면을 골라 멈춰 세운다. 김혜리는 줄거리 전체를 요약하거나 주제를 먼저 선언하지 않았다. 한 인물의 표정과 시선, 프레임 안에서 몸이 놓인 위치, 대사 사이에 생긴 침묵처럼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세부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작은 장면이 앞뒤의 장면과 어떻게 호응하는지 살피면서 인물의 마음과 영화의 형식, 끝내는 작품 전체가 바라보는 세계로 범위를 넓혀갔다. 미시적인 관찰이 거시적인 해석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글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밀도가 난해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많은 영화평론이 어려운 말로 권위를 지킨다고 의심했지만 김혜리의 글은 짧고 읽기 쉬웠다. 쉬워서 단순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가장 정확한 단어와 문장만 남긴 글에 가까웠다. 나는 당시 그가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여전히 사전을 들고 다닌다는 일화를 적어두었다.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어 가운데 장면에 꼭 맞는 하나를 고르는 일이 문장을 만든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던 것이다. 한 장면을 오래 들여다보되 자신이 본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과장하지 않았고, 감탄을 늘어놓는 대신 그 장면이 왜 자신을 멈춰 세웠는지를 설명했다. 좋은 작품을 칭찬하면서도 형용사에 기대지 않았다. 무엇이 화면에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독자가 따라갈 수 있게 했다.


그의 글에서 함께 배운 것은 확신보다 두려움이었다. 나는 『영화를 멈추다』뿐 아니라 『영화야 미안해』와 『그녀에게 말하다』의 머리말에서도 김혜리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길게 적었다고 기록했다. 이미 오래 영화를 보고 자기 이름으로 비평을 발표한 사람도 쓰는 일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당시의 나는 전문가라면 장면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보고 거침없이 문장을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전문성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잘못 볼 가능성을 알고도 장면으로 돌아가 다시 확인하는 습관에 가까웠다. 이름을 걸고 해석을 내놓는 일이 자신의 시선과 한계를 함께 공개하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기에 문장을 쉽게 확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장면을 보았는데도 그와 내가 서로 다른 영화를 본 것처럼 느껴진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김혜리에게 장면은 이미 정한 주제를 입증하기 위한 예시가 아니라 생각을 시작하게 하는 근거였다. 반면 나는 결론을 먼저 세운 뒤 영화에서 그 결론에 필요한 것만 골라내곤 했다. 그 차이를 확인하려고 〈멋진 하루〉를 두 눈 부릅뜨고 보았다. 영화를 본 다음에는 지인과 조각 그림을 맞추듯 대사와 표정, 컷의 의미를 더듬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처음에 써놓은 해석보다 내가 놓친 장면이 더 많아졌다. 결국 거의 완성했던 비평을 삭제했다. 이전 같았으면 부족한 부분을 수사로 메워 끝까지 발표했겠지만, 그때는 그것이 내가 실제로 본 영화보다 내가 보고 싶어 한 영화에 관한 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김혜리의 글이 내게 남긴 변화는 그의 해석을 정답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니었다. 비평의 차이가 특별한 감수성이나 어려운 어휘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보고 얼마나 정직하게 자신의 경로를 공개하는가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나는 바카라을 읽고 “전투에 임할 자격도 되지 않으면서 총만 휘갈겼다”고 자바카라했다. 영화는 감독이 출제한 문제이고 관객은 제한시간 안에 정답을 맞혀야 한다는 오래된 생각도 그때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흘렀다. 여전히 부끄러운 문장을 쓰면서 〈HOPE〉와 이동진을 둘러싼 반응을 비판했더니, 일부가 내게도 흘러왔다. 분석이 구체적이지 않다, 어려운 용어를 쓰면 그럴싸해 보이는 줄 아느냐, 일반 관객과 유리된 비평은 엘리트주의라는 말이었다. 익숙했다. 스무 해 전 내가 평론을 향해 던졌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별로 상처받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일 것이다. 다만 그 말들 아래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내가 과거의 평론가들 앞에서 느꼈던 가장 큰 감정 역시 분노가 아니라 자격지심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만이 아니라 자신이 끝내 닿지 못할 것 같은 문장을 공격하기도 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렇다고 모든 비판을 열등감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어렵고 부실한 비평은 실제로 존재하고, 전문가의 이름이 빈약한 논증을 구해주지도 않는다. 〈HOPE〉가 재미없었다는 감상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다만 영화가 재미없었다는 말과 그 영화를 좋게 평가한 사람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는 주장은 같은 종류의 문장이 아니다. 전자는 개인의 감상이고 후자는 증거가 필요한 사실 주장이다. 이 경계를 넘는 순간 토론은 작품에서 사람으로 이동한다.


민주슬롯에서 발언권은 동등하지만 모든 판단의 무게까지 저절로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 분야를 오래 공부한 전문가도 틀릴 수 있고 처음 영화를 본 관객도 정확한 장면을 짚을 수 있다. 둘의 차이는 신분이 아니라 결론에 이르는 경로에서 생긴다. 무엇을 보았고, 어떤 근거를 연결했으며, 반대되는 장면 앞에서 자신의 해석을 수정했는지가 설득력을 결정한다. 다양성은 여러 의견이 존재할 권리를 보장하지만 그 의견을 모두 정당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전문성 또한 존중을 요구하기 전에 자신의 경로를 드러내야 한다.


해석이 실을 푸는 손이라면 평론은 그 실로 새로운 천을 짜는 손이다. 누가 옳은지를 확인하는 일은 쉽지만 서로 다른 감상이 왜 가능했는지를 묻는 일은 어렵다. 이동진은 〈HOPE〉가 훌륭하다는 것은 자신의 의견이고 형편없는 영화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라고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어느 한쪽에 동의한다고 그 의견이 사실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감독의 인터뷰 역시 정답지가 아니다. 창작자의 의도는 중요한 참고이지만 작품이 실제로 무엇을 보여주었는지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과 평론가의 말을 수능시험 뒤 가채점표처럼 사용하면 자신의 감상은 누군가의 승인 여부에 따라 맞거나 틀린 답이 된다.


영화 속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을 위협으로 규정했다. 영화 밖의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를 오만하다고 말하고, 납득할 수 없는 평론을 권위주의라고 말하며, 다른 관객을 무지하다고 규정한다. 영화는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을 그렸고 우리는 그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소비했다. 극장의 불이 켜진 뒤 영화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호포항으로 들어간 셈이다.


그렇다면 미지를 견딘다는 것은 무엇일까. 판단을 포기하거나 모든 해석을 같은 무게로 존중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서사의 실패와 의도된 공백을 구분하고, 평론의 근거를 따지며, 틀린 주장을 반박해야 한다. 다만 검토가 끝나기 전에 작품을 쓰레기로, 호평한 사람을 이해관계자로, 혹평한 관객을 무지한 사람으로 확정하지 않는 일이다. 이해는 동의가 아니며 판단을 늦추는 것은 판단을 흐리는 일이 아니다. 바카라임을 더 정확한 곳에 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제목이 가장 어렵다. 영화는 스스로를 〈HOPE〉라고 부르지만 정작 그 안에는 희망이라 부를 만한 장면이 거의 없다. 우리가 본 것은 희망보다 희망이 부재한 조건이고, 화해보다 화해가 불가능해지는 과정이며, 이해보다 이해가 시작되기도 전에 판단이 끝나는 순간이다. 이 작품이 더 큰 이야기의 첫 장처럼 느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희망의 성취가 아니라 왜 희망이라는 말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긴 프롤로그에 가깝다.


2008년의 나는 영화가 답을 주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지금은 답이 없는 상태에 조금 더 머물러보려 한다. 다른 작품 앞에서 다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것이고 나와 다른 감상을 말하는 사람의 동기를 의심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영화가 끝난 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정답을 고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됐다. 무엇을 보았는지 다시 확인하고, 내 판단이 어떤 경로를 거쳐 만들어졌는지 돌아보는 일.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해도 그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 일. 이 명징한 폭력이 계속되는 세계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희망은 어쩌면 그 정도의 지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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