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by우홍강

낫고 싶었다. 그 마음만은 진짜였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속으로 숨었다.


처음엔 소설이었다. 한 권을 덮으면 다음 권을 폈고, 그 권을 덮으면 또 다음 권을 폈다. 활자와 활자의 좁은 틈에 나를 끼워 넣고 있으면, 그 몇 줄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빨리, 더 많이 읽었다. 문장이 끊기는 순간 그녀가 돌아왔으므로, 나는 문장이 끊기지 않도록 바카라장을 넘기고 또 넘겼다. 미술관에도 갔다. 평일 낮의 전시실은 늘 비어 있었고, 나는 그림 한 점 앞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서 있었다. 붓이 만들어 낸 다른 세계의 빛 속으로 들어가면, 잠시 이 세계의 내가 지워졌다. 음악을 들었고, 자막조차 켜지 않은 옛 흑백영화를 보았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부 머금은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나는 그 아름다움을 윤이 아닌 다른 모든 곳에서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녀를 지우는 데에도, 그녀가 아닌 아름다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볼수록, 나는 그녀를 보았다. 어느 명화 속 여인의 비스듬한 옆얼굴에서 그녀를 보았고, 읽던 시의 행과 행 사이 빈자리에서 그녀의 마지막 말을 읽었다. 갈색 물감이 칠해진 캔버스 앞에서는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단풍잎보다 조금 더 어두운 그 색. 잊으려는 모든 노력이, 끝내 그녀를 한 번 더 떠올리는 일로 끝났다. 그 독한 목소리는 잦아들기는커녕, 내가 부어 넣는 아름다움을 연료 삼아 더 환하게 타올랐다. 마음의 동굴에서 한 번 울린 그 소리는, 밖으로 나갈 줄을 몰랐다. 낮에도 밤에도 같은 메아리가 맴돌았다. 답답함에 잠을 깨는 밤이 잦아졌고, 그렇게 나는 조금씩 투명해졌다.


전학 간 학교에서, 나는 점점 더 투명해졌다. 수업 중에 선생이 출석부를 짚으며 내 이름을 부르면, 교실의 모든 고개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입학 첫날, 9반 뒷문을 열었을 때처럼. 다만 이번엔 그 시선의 끝에 그녀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손을 들었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아이들 얼굴에 떠오르던 그 난감함을, 나는 견디는 법을 끝내 배우지 못했다.


처음엔 수군거림이었다. 곧 '벙어리'라는 세 글자가, 내 이름이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누군가 내 바카라상 위에 수화 바카라을 올려놓고 갔다. 누군가는 내 앞에서 일부러 크게, 천천히 말했다. 내가 못 듣는 줄 아는 것처럼. 나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화를 낼 목소리가 없었으므로. 소문은 이번에도 발이 없이 달렸고, 이번에 그 소문 한가운데 선 건 나였다. 그제야 나는 윤이 급식실 구석에서 어떤 얼굴로 숟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너무 늦게.


나는 창밖만 보았다. 다른 도시, 다른 학교에 있을 그녀를 떠올리며. 닿을 수 없는 사람을 닿을 수 없는 자리에서 그리워하는 일에, 나는 조금씩 능숙해졌다. 그것이 그 시절 내가 익힌 유일한 기술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수업 시간을 집어삼키고, 끝내는 펜을 쥐는 일조차 버거워졌을 무렵, 담임이 나를 따로 불렀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자퇴라는 단어를 아주 조심스럽게 꺼냈다. 마치 그 단어가 나를 한 번 더 부술까 봐 겁내는 사람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3학년, 모두가 가장 바쁘게 노를 젓던 시기였다.

남들이 노를 저을 때, 나는 노를 놓아 버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별 뒤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었으므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문은, 오래도록 다시 열리지 않았다.


커튼은 늘 쳐져 있었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흐려졌고, 시간은 오직 바카라의 두께로만 흘렀다. 다 읽은 바카라이 바닥에서부터 쌓여 무릎 높이의 성벽을 이루었고, 나는 그 성 안에 웅크려 지냈다. 어머니는 하루 세 번 문 앞에 밥상을 두고 갔다. 국이 식고 밥에 마른 막이 앉는 동안, 나는 그중 절반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노크 소리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목소리가 없었으므로. 문 너머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발소리를, 나는 매번 똑똑히 들었다. 어쩌면 그 발소리가, 내가 세상과 나눈 거의 유일한 대화였다.


아버지는 말이 더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밤엔가, 문 앞에 바카라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내가 좋아할 만한 거라며 누가 골랐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어설픈 선택의 바카라들이었다. 그 투박한 표지에 아버지의 서툰 마음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바카라들만은 끝내 펼치지 못했다.


스무 살 생일 아침에는 밥상 대신 작은 케이크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초는 꽂혀 있지 않았다. 불을 붙여 놓고 갈 수는 없었을 테니까. 케이크 옆 접시에는 장조림이 담겨 있었다. 메추리알만 골라서, 수북하게. 나는 그 접시를 방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고, 메추리알을 하나씩 먹었다. 다 먹을 때까지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실패했다.


시간은 나를 비켜 흘렀다. 친구였던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군대에 가고, 누군가는 벌써 첫 출근을 하는 동안, 나는 같은 방 같은 자리에서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열아홉이 스물이 되고, 스물이 다시 스물셋이 되었다. 다 큰 아들이 일도 학교도 없이 부모의 집에 얹혀, 그저 숨만 쉬고 있었다. 나는 분명, 누군가의 짐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세상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세상에 나가 마주칠 내 꼴이 무서웠다. 거울 속의 나는 어느새 어른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든 나는 여전히 정류장에서 버스를 놓치던 열여섯에 멈춰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닫힌 문 앞에 섰다. 한참 기척만 있다가, 이윽고 목소리가 들렸다. 화도, 다그침도 없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휘야. 대학이라도…… 한번 가 보지 않을래. 엄마는 그냥…… 네가 집 밖을 한 번이라도 나갔으면 좋겠어. 딱 한 번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입학 첫날 아침, 부엌에서 나를 두고 '사춘기라 그렇겠지' 하던 그 목소리였다. 칠 년 사이, 그 목소리는 한참 늙어 있었다. 나는 문에 이마를 가만히 댔다. 대답 대신, 그렇게라도 닿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