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룩백]
비가 갠 거리에 젖은 보도블록 사이를 우산을 편 채 깡총한 걸음으로 발랄하게 걷는 세일러 칼라 교복을 입은 여고생의 이미지. 그리고 빨강 목도리에 흰 얼굴을 파묻고 눈 밭에 선 소녀의 모습.
나에게 일본 감성은 저런 모습이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별로 본 게 없다 보니, 선입견은 30년을 간직한 한 장의 사진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은 나에게만 흐른 것인지, 올해 개봉하는 일본 영화의 포스터는 오래전 본 '한 장의 사진 같은 선입견'과 비슷한 모습이다.
내가 신선들 바둑놀이 구경하다 돌아온 것이 아니라면, 일본 감성은 여전히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혹시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김 제미나이! 영화 <룩백> 개봉일이 진짜 2026년 10월이 맞아? 개봉 연도까지 다시 확인해 줘."
전에 김 제미나이에게 한 번 낚인 적이 있어 눈꼬리를 바짝 올리며 닦달을 해본다.
괜히 제미나이 쥐어박으며 확인해 본 결과, 곧 개봉할 영화가 맞다.
'쏘리, 제미나이. 성까지 붙여서 부를 일이 아니었네.'
기억 속의 일본 감성은 아직 20대인데, 나만 나이를 엄청 먹었다.
나이가 맛있는 것도 아니건만, 한 번 빼먹지도 않고 언제 이렇게 다 먹었대? 쓸데없이 성실하기는.
나의 얄팍한 식견으로 한 예측의 결과답게, <룩백> 속 소녀들은 눈 밭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지는 않는다.
대신 그녀들의 꿈을 외친다. 꿈만 먹어도 배 부를 나이의 두 아이가 꿈을 외치는 영화라니, 마음에 든다.
특히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다.'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비장함이 없어서 마음에 든다.
안 해본 것을 새로 시작하기 전에 비장해지는 중년에겐 저렇게 심호흡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내뱉는 디렉션 그 자체가 꿈이다.
뭐든 시작해 볼 수 있는 사람이 힘주어 말할 필요가 뭐 있겠나? 마치 햄버거 주문 하듯 힘은 빼지만, 카운터 뒤의 사람에게는 들릴 정도로 볼륨만 키우면 될 뿐.
<룩백>의 주인공의 저 혼잣말 같은 담백한 다짐은, 어느 순간부터 '드럼이라도 좀 배워볼까?' 하는 혼잣말도 입 속으로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내 입을 떠난 말은 다시 붙잡아놓지 못할 야생마가 될까, 나잇값 하려고 말에 너무 많은 무게추를 달아놓았나 보다.
여자아이의 일본어 톤이 가볍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독백은 산들산들 기분전환이 되는 소리로 들렸다.
이십 대의 끄트머리즈음
'꿈은 무슨.'이라는 혼잣말을 하며, 30대의 문 앞에서 내려놓고 지금까지 빈 손으로 걸어온 현실주의자의 마음이 예고편을 보며 말캉해진다. 한편으로는, 지키지 못한 물풍선 같은 꿈과 그 물풍선을 내려놓은 덕에 양손으로 빚어 온 '오늘'은 꽤 괜찮은 교환이었다는 위안을 한다.
내가 내려놓은 물풍선을 주물럭 거리는 아이는 우리 집에도 있기 때문이다.
<룩백> 속 소녀들처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둘째 말이다.
학원에서 알려주는 공식과 평범한 손재주, 그리고 비범한 엉덩이 힘으로 들어간 미대에 간 나는 대강대강 슥슥 그어 쉽게 제출하는 천재의 재능을 보고 '저런 애들이 그림 그려 먹고 살 애구나.' 했다.
그리고 그 대강대강 슥슥 그어 쉽게 완성하는 그림을 수십 장 그려내는 둘째의 재능을 보고 뒤늦은 깨달음도 얻었다.
그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것으로 보였던 친구들도, 최소한의 학업 성적표를 갈고닦아주는 엄마들의 엉덩이 힘으로 여기 들어온 것이었음을.
둘째가 스무 살까지, 얼마나 큰 물풍선을 손에 들고 올 지는 모르지만, 벌써 방울토마토만 한 물풍선이나마 손에 쥔 것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룩백> 속 소녀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리고 예고편 내내 보이는 등 돌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도.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집 안에서 투명 망토를 쓴 것처럼 지워지듯, 그림을 끼적이는 동안의 둘째도 배경처럼 숨겨진다.
글을 끼적이는 낙서쟁이와 그림 끼적이는 낙서쟁이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느새 나도 방울토마토만 한 물풍선을 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글자 끼적이던 낙서쟁이가 자판 치던 손을 멈추고 뒤돌아 그림 끼적이는 낙서쟁이의 방을 한번 들여다본다.
창작에 열중하던 시간을 잠시 멈추고 <룩백>하면 TV소리가 들린다. 냉장고 문을 열고 간식을 찾던 막내와도 눈이 마주친다.
오랜만에 바카라을 펼친 누군가가 평소보다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글을 쓰는 동안 지워졌던 낙서쟁이의 등 뒤에서는 생활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은 들리지 않던 질문도 들려온다.
"엄마. 내 아이스크림 혹시 못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