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살아야 사랑일까

우리 당일치기 아니야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7화. 같이 살아야 사랑일까

제주공항 자동문이 열리자 바람이 먼저 두 사람을 맞았다.

윤해원은 어깨에 작은 가방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강태헌이 옆에서 해원의 가방을 내려다봤다.

“끝?”

“뭐가?”

“짐.”

“응.”

“진짜 이것만 가져왔어?”

“응.”

태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해원, 우리 당일치기 아니야.”

“알아.”

“그런데 가방이 왜 그것뿐이야?”

해원이 피식 웃었다.

“제주에 다 있어.”

“뭐가?”

“옷도 있고, 화장품도 있고, 신발도 있고. 필요한 건 웬만하면 다 있어.”

태헌은 잠시 해원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너한테 제주는 여행지가 아니구나.”

그 말에 해원이 걸음을 조금 늦췄다.

맞았다.

제주는 그녀에게 관광지가 아니었다.

도망치는 곳도 아니었고 특별한 날에만 찾는 섬도 아니었다.

서울의 삶이 너무 빽빽해질 때면 숨을 조금 크게 쉴 수 있는 곳.

어쩌면 또 하나의 생활이었다.

“가자.”

해원이 먼저 걸었다.

태헌이 뒤따랐다.

“내 가방은 이렇게 큰데.”

“누가 많이 가져오래?”

“여자친구랑 첫 여행인데 준비 좀 했지.”

해원이 돌아봤다.

“뭘 준비했는데?”

태헌이 웃었다.

“비밀.”

“수상한데.”

“기대해.”

“더 수상해.”

둘은 나란히 웃으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렌터카를 운전한 사람은 태헌이었다.

해원은 조수석에 앉았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평소에는 자신이 운전하는 게 편했다.

누군가의 차에 타면 괜히 신경이 쓰였다.

길을 잘못 들면 알려줘야 할 것 같고,

운전하는 사람이 피곤해 보이면 자신이 대신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태헌 옆에서는 조금 달랐다.

“졸리면 자.”

“안 졸려.”

“또 시작이네.”

“뭐가?”

“안 졸려. 안 피곤해. 안 힘들어.”

해원이 창밖을 보며 웃었다.

“조금 졸려.”

“자.”

“길 알려줘야 돼.”

“내비게이션 있어.”

“그래도.”

“윤해원.”

“왜.”

“오늘부터 제주에서는 하나만 연습해.”

“뭘?”

“아무것도 안 하기.”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그게 제일 어려운데.”

“그러니까 연습하자고.”

“뭘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

“알아.”

태헌이 앞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운전하잖아.”

해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좋았다.

내가 할게.

너는 쉬어.

자신이 평생 누군가에게 자주 했던 말.

그 말을 이제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해원은 의자를 조금 뒤로 젖혔다.

“그럼 20분만.”

태헌이 웃었다.

“한 시간 자도 돼.”

“20분.”

“알겠습니다.”

해원은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바다가 보였다.

“여기 어디야?”

“한 시간.”

“뭐?”

태헌이 웃었다.

“한 시간 잤다고.”

해원이 벌떡 일어났다.

“왜 안 깨웠어?”

“잘 자는데 왜 깨워.”

“한 시간이나?”

“침도 흘리더라.”

해원이 입가를 급히 만졌다.

태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이야.”

“죽을래?”

“깨어나자마자 폭력적이네.”

해원도 웃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낮은 돌담.

멀리 보이는 바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제주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수없이 왔던 제주인데 오늘은 처음 오는 곳처럼 느껴졌다.

옆에 있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해원의 제주 집은 아직 손볼 곳이 남아 있었다.

문을 열자 태헌이 천천히 안을 둘러봤다.

“여기가 네 집이구나.”

“응.”

“좋다.”

“아직 공사 덜 끝났어.”

“그래도 좋네.”

태헌은 창가로 갔다.

멀리 바다가 조금 보였다.

“여기서 살고 싶겠다.”

해원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끔 그런 생각해.”

“서울 정리하고?”

“완전히는 아니고.”

해원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서울도 있고, 제주도 있고.”

“왔다 갔다?”

“응.”

“여행도 다니고?”

“응.”

태헌이 뒤에서 물었다.

“누구랑?”

해원이 돌아봤다.

“왜?”

“중요하잖아.”

“혼자.”

태헌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해원이 웃었다.

“왜.”

“나는?”

“너도 네 인생 살아야지.”

태헌이 잠시 말이 없었다.

장난으로 넘길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해원이 먼저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거짓말.”

“나중에 얘기하자.”

그 말이 해원의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오후에는 둘이 시장에 갔다.

생선과 채소를 조금 사고,

막걸리도 한 병 샀다.

태헌이 고기를 집어 들었다.

“이것도.”

“둘이 먹는데 너무 많아.”

“남으면 내일 먹지.”

내일.

그 말이 이상하게 좋았다.

오늘 먹고 끝나는 사이가 아니라 내일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사람.

해원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했다.

태헌이 마늘을 까고 해원이 채소를 씻었다.

“너 칼질 잘하네.”

태헌이 말했다.

“내가 한 음식 먹어봤잖아.”

“그거 말고.”

“뭐?”

“이렇게 같이 해보니까.”

태헌이 웃었다.

“되게 오래 같이 산 사람들 같다.”

해원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런 말 하지 마.”

“왜?”

“부담스러워.”

태헌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다.

“미안.”

해원이 오히려 당황했다.

“뭘 또 미안해.”

“싫다며.”

“싫다는 게 아니라.”

해원은 적당한 말을 찾았다.

“아직 그런 말은 조금 그래.”

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다시 마늘을 깠다.

더 묻지 않았다.

그게 또 미안했다.

해원은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가오면 부담스럽고,

물러나면 서운했다.

사랑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모순적인 걸까.

저녁을 먹은 뒤 둘은 바다로 나갔다.

몇 년 전 그날의 바다였다.

태헌의 마음이 처음 흔들렸다는 곳.

그런데 날씨는 너무 좋았다.

구름도 거의 없었다.

해원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 안 오네.”

태헌이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 우산이었다.

해원이 웃었다.

“진짜 가져왔어?”

“약속했잖아.”

“비도 안 오는데?”

“상관없어.”

태헌이 우산을 펼쳤다.

“미쳤다.”

“들어와.”

“싫어.”

“윤해원.”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

“제주에서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뭘.”

해원은 한참 웃다가 결국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맑은 하늘 아래 검은 우산 하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바라봤다.

해원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짜 창피해.”

“그럼 더 붙어.”

“왜?”

“우산이 작잖아.”

“일부러 작은 거 샀지?”

“응.”

태헌이 너무 당당하게 대답해서 해원은 또 웃었다.

어깨가 닿았다.

팔이 닿았다.

몇 년 전에는 닿을까 봐 몸을 피했다.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해원이 조금 더 가까이 걸었다.

태헌이 알아챘는지 해원을 바라봤다.

“왜 봐?”

“그냥.”

“또 그냥.”

“좋아서.”

해원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두 사람은 방파제에 앉았다.

우산은 옆에 접어두었다.

해가 천천히 바다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태헌이 말했다.

“해원아.”

“응.”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뭔데.”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

해원은 바다를 바라봤다.

“갑자기?”

“응.”

“돈 많이 벌면서.”

태헌이 웃었다.

“그거 말고.”

“건강하게.”

“그것도 말고.”

“그럼 뭔데?”

태헌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누구랑 살고 싶은지.”

해원의 표정이 굳었다.

결국 그 질문이었다.

26화 마지막에 예고됐던,

사랑하느냐는 질문보다 어려운 질문.

해원은 한참 말이 없었다.

“나 혼자 살고 싶은데.”

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진짜.”

“응.”

“누구 밥 챙기고 싶지도 않고.”

“응.”

“누구 빨래하고 싶지도 않고.”

“그건 각자 하면 되지.”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내 말은 그런 게 아니야.”

“알아.”

태헌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누구의 아내로 다시 살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

해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확했다.

“응.”

그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나는 그냥 윤해원으로 살고 싶어.”

“응.”

“엄마도 아니고.”

“응.”

“누구 아내도 아니고.”

“응.”

“누구 뒷바라지하는 사람도 아니고.”

해원은 바다를 바라봤다.

“내가 가고 싶은 곳 가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쉬고 싶으면 쉬고.”

“응.”

“그렇게 살고 싶어.”

태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원은 그 침묵이 무서웠다.

“왜 아무 말 안 해?”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좋아서.”

“뭐가?”

“네가 원하는 삶이 있어서.”

해원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그를 바라봤다.

태헌이 말했다.

“나는 네가 나 때문에 그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없어.”

“그럼 왜 물어봤어?”

“그 삶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궁금해서.”

해원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태헌은 계속 말했다.

“매일 같이 안 살아도 돼.”

“……”

“결혼 안 해도 되고.”

“……”

“서울에 네 집 있고 제주에 네 집 있어도 되고.”

태헌이 웃었다.

“나도 내 집 있으면 되고.”

해원이 물었다.

“그게 연애야?”

“왜 아니야?”

“사람들은 보통 사랑하면 같이 살고 싶어 하잖아.”

“나도 같이 있고 싶지.”

태헌은 바다를 바라봤다.

“근데 같이 있는 방법이 꼭 한 집에서 매일 아침 눈 뜨는 것뿐일까?”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네 삶 옆에 내 삶 하나 놓고 싶어.”

태헌이 말했다.

“섞어서 하나로 만들기보다.”

그 말이 해원의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내 삶 옆에 네 삶.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가는 것.

“그럼 늙어서도?”

해원이 물었다.

“응.”

“각자 집에서?”

“그때는 모르지.”

태헌이 웃었다.

“무릎 아프면 합칠 수도 있고.”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기준이 무릎이야.”

“계단 오르기 힘들어지면 같이 살아야지.”

“웃겨.”

“그때 내가 밥 할게.”

“네가?”

“응.”

“못 믿겠는데.”

“연습하지 뭐.”

해원이 웃었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태헌아.”

“응.”

“너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야?”

태헌은 꽤 오래 생각했다.

“너랑 오래 있고 싶어.”

“그게 결혼 아니야?”

“꼭 그런가?”

그가 해원을 바라봤다.

“나는 서류보다 네 마음이 더 궁금해.”

“내 마음?”

“응.”

태헌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네 옆에 오래 있어도 되는지.”

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저녁노을이 거의 사라졌다.

바다가 짙어졌다.

바람도 조금 차가워졌다.

태헌이 일어났다.

“가자.”

“응.”

다시 우산을 펼쳤다.

해원이 웃었다.

“이제 어두운데도 쓰려고?”

“약속은 지켜야지.”

두 사람은 다시 작은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걷다가 해원이 말했다.

“태헌아.”

“응.”

“나 아직 평생은 모르겠어.”

태헌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알아.”

“그리고 같이 사는 것도 모르겠고.”

“응.”

“결혼은 더 모르겠어.”

“응.”

해원이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근데.”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다음 여행은 같이 가고 싶어.”

태헌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어디?”

“몰라.”

“알래스카?”

“너무 멀어.”

“베트남?”

“그건 괜찮네.”

“몽골?”

“생각해 볼게.”

“또 생각해 본대.”

해원이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다음 여행도.”

태헌이 멈췄다.

해원도 멈췄다.

“뭐?”

“그다음 것도.”

태헌이 한동안 해원을 바라봤다.

“그게 네 대답이야?”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태헌이 웃었다.

“충분해.”

또 그 말이었다.

충분해.

해원이 줄 수 있는 만큼만 받아주는 사람.

태헌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해원이 먼저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웠다.

태헌이 내려다봤다.

“왜?”

“우산 작잖아.”

“비 안 오는데.”

“조용히 해.”

태헌이 웃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걸었다.

맑은 제주 밤하늘 아래,

비 한 방울 오지 않는데도 우산 하나를 함께 쓰면서.

집에 돌아와 태헌은 거실 소파에 이불을 폈다.

해원이 방문 앞에서 물었다.

“거기서 자려고?”

“응.”

“불편할 텐데.”

“괜찮아.”

해원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방 하나 더 있는데.”

태헌의 손이 멈췄다.

“써도 돼?”

“그럼 왜 방이 있어.”

“혹시 나한테 너무 많이 들어오지 말라고 할까 봐.”

해원이 피식 웃었다.

“오늘은 한 발 들어와도 돼.”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그 말의 의미를 둘 다 알았다.

같은 방이라는 뜻도 아니었다.

같은 침대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공간 안에 조금 더 들어와도 된다는 뜻이었다.

“잘 자.”

해원이 말했다.

“너도.”

해원이 방문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다.

벽 하나 너머에 태헌이 있었다.

이상했다.

불편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마음이 편했다.

해원은 천장을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들었다.

태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

바로 답이 왔다.

‘아직.’

‘왜?’

‘좋아서.’

해원이 웃었다.

‘뭐가?’

잠시 뒤 답이 왔다.

‘벽 하나 건너에 네가 있는 거.’

해원은 한참 그 문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썼다.

‘나도.’

이번에는 ‘조금’을 붙이지 않았다.

보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사랑이 꼭 하나가 되는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각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면서도,

각자의 공간을 지키면서도,

서로의 하루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

오늘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잠들고,

내일은 같은 바다를 보고,

언젠가는 또 서로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렇게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윤해원은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강태헌과 평생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 사람과 오래 걸어보고 싶다고.

그것이면 지금은 충분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해원이 눈을 떴을 때,

태헌은 집에 없었다.

식탁 위에는 커피 한 잔과 짧은 메모 한 장만 놓여 있었다.

해원은 메모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해원아.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

이번에는 네가 기다려줘.’

윤해원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기다려줘.

언제나 기다리는 것이 두려웠던 여자에게,

강태헌이 처음으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27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