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내가 갈게

자동차 열쇠를 집어 들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5화. 이번에는 내가 갈게

“병원.”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 윤해원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는 것도.

오늘 하루가 길었다는 것도.

내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그저 자동차 열쇠를 집어 들었다.

몇 년 전 제주에서 비를 맞고 있던 자신에게 강태헌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해원이 가고 있었다.

태헌에게.

병원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밤길은 한산했지만 해원은 자꾸 신호에 걸렸다.

빨간불이 켜질 때마다 조급해졌다.

“괜찮다며.”

혼잣말을 했다.

“크게 안 다쳤다며.”

그런데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태헌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운전 중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태헌의 목소리는 분명 괜찮았다.

그래도 이상했다.

누군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고 이렇게 가슴이 내려앉을 수 있는 걸까.

신호가 바뀌었다.

해원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이었다.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왜.”

“어디야?”

“가는 중.”

“진짜 오는 거야?”

“그럼 가짜로 가?”

잠시 침묵.

태헌이 웃었다.

“그 말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해원도 그제야 생각났다.

몇 년 전 제주.

비 오는 날 자신이 물었다.

‘너 진짜 왔어?’

태헌은 말했다.

‘그럼 가짜로 와?’

해원의 입가에 잠깐 웃음이 번졌다.

“그러게.”

“해원아.”

“응.”

“천천히 와.”

“알았어.”

“진짜 괜찮아.”

“얼굴 보고 판단할 거야.”

“의사 선생님보다 네가 더 정확해?”

“응.”

태헌이 웃었다.

“알겠습니다. 윤 선생님.”

“끊어. 운전해야 돼.”

“해원아.”

“또 왜.”

“고마워.”

해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 보고 해.”

“뭘?”

“고맙다는 말.”

전화를 끊었다.

병원 응급실 앞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

해원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었다.

평소 같으면 뛰지 않았을 것이다.

넘어지면 어떡해.

무릎 아파.

숨차.

그런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자동문이 열렸다.

소독약 냄새.

하얀 조명.

늦은 밤에도 오가는 사람들.

해원은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그리고 멀리 의자에 앉아 있는 태헌을 발견했다.

순간 걸음이 멈췄다.

태헌은 오른쪽 이마에 작은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팔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났다.

걱정했던 마음이 전부 화로 바뀌었다.

해원은 빠르게 다가갔다.

“강태헌.”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해원을 보자 웃었다.

“왔어?”

“웃어?”

“그럼 울어?”

“너 이게 안 다친 거야?”

“이 정도면 안 다친 거지.”

해원은 말없이 그의 팔을 살폈다.

“어디 더 다쳤어?”

“없어.”

“검사는?”

“했어.”

“머리는?”

“괜찮대.”

“진짜?”

“응.”

“거짓말하면 죽어.”

태헌이 웃었다.

“사고 나서 살아왔는데 너한테 죽겠네.”

“장난하지 마.”

해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제야 태헌의 웃음이 사라졌다.

“해원아.”

“왜.”

“많이 놀랐어?”

“아니.”

습관처럼 나온 말이었다.

태헌이 가만히 해원을 바라봤다.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응.”

태헌의 눈빛이 달라졌다.

“많이 놀랐어.”

이번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전화 안 받으니까 별생각이 다 들었어.”

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우리가 규칙까지 만들었잖아. 연락 안 된다고 계속 전화하지 말자고.”

“응.”

“그래서 세 번까지만 했어.”

“알아.”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해원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태헌이 천천히 일어났다.

“미안해.”

“미안하라고 하는 말 아니야.”

“알아.”

“그냥.”

해원은 고개를 숙였다.

“무서웠어.”

태헌이 조용히 해원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이번에는 해원이 손을 빼지 않았다.

사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앞차가 갑자기 멈췄고 태헌이 급하게 피하다 가드레일을 살짝 들이받았다.

큰 사고는 아니었다.

에어백이 터졌고,

그 충격으로 이마와 팔에 가벼운 상처가 생겼다.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었다.

“그러니까 괜찮다니까.”

태헌이 말했다.

해원이 흘겨봤다.

“오늘은 네 말 안 믿어.”

“의사 말은?”

“그건 믿어.”

“차별하네.”

“조용히 해.”

태헌이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자 그제야 해원의 심장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료가 끝난 뒤 둘은 병원을 나왔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태헌이 물었다.

“내 차는 견인됐어.”

“알아.”

“택시 타고 갈게.”

해원이 걸음을 멈췄다.

“뭐?”

“너 피곤하잖아.”

“그래서?”

“집에 가서 자.”

해원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강태헌.”

“응.”

“내가 여기 왜 왔어?”

“나 보러.”

“그런데 너 택시 태워 보내려고?”

“집까지 멀잖아.”

“타.”

“뭘?”

“내 차.”

“해원아.”

“말 많아.”

태헌이 웃었다.

“알았어.”

차에 올라탄 뒤 태헌은 안전벨트를 맸다.

해원은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태헌이 해원을 보고 있었다.

“왜 봐?”

“그냥.”

“또 그냥.”

“좋아서.”

해원은 고개를 돌렸다.

“사고 나더니 이상해졌네.”

“원래 좋아했잖아.”

“그만해.”

“왜?”

“운전 집중 안 돼.”

태헌은 그제야 앞을 봤다.

한동안 차 안에는 음악만 흘렀다.

새벽 도로.

가로등.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

태헌이 조용히 말했다.

“해원아.”

“응.”

“아까 사고 났을 때.”

“응.”

“진짜 별생각 다 들더라.”

해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생각.”

“사람이 웃긴 게.”

태헌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큰 사고도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더라.”

해원은 묻지 않았다.

태헌이 스스로 말했다.

“네가 제일 먼저 생각났어.”

해원은 앞만 바라봤다.

“아침에 네가 약속하라고 했잖아.”

“뭘.”

“아프면 말하라고.”

“응.”

“그래서 전화한 거야.”

해원의 눈이 조금 뜨거워졌다.

태헌이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집에 갔을 거야.”

“왜?”

“누가 걱정하는 거 싫어서.”

해원이 피식 웃었다.

“나랑 똑같네.”

“그러니까 우리가 피곤한 인간들끼리 만난 거지.”

해원도 웃었다.

맞았다.

두 사람은 닮았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

도움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게 편했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보다 괜찮다고 말하는 게 익숙했다.

그런 두 사람이 이제 서로에게만큼은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태헌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해원이 차를 세웠다.

“내려.”

“응.”

그런데 태헌이 내리지 않았다.

“왜.”

“가기 싫다.”

“네 집이잖아.”

“그러니까.”

해원이 웃었다.

“어린애야?”

“한 살 어리잖아.”

“그걸 이럴 때 써먹어?”

“응.”

해원이 고개를 저었다.

태헌은 해원의 손을 잡았다.

“오늘 진짜 고마워.”

“알았어.”

“와줘서.”

“알았다니까.”

“해원아.”

“왜.”

“아까 네가 오는 동안 계속 생각했어.”

“뭘.”

태헌이 해원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나 이제 혼자 아니구나.”

해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아니었다.

평생 같이 살자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어떤 말보다 깊이 들어왔다.

나 이제 혼자 아니구나.

해원은 천천히 태헌을 바라봤다.

그의 이마에 붙은 작은 거즈가 눈에 들어왔다.

“태헌아.”

“응.”

“나도.”

태헌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가?”

“나도 이제.”

해원은 잠시 숨을 골랐다.

“혼자 아닌 것 같아.”

태헌은 말없이 해원의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아주 천천히.

“이리 와.”

태헌이 말했다.

“왜?”

“그냥.”

“또 뭐 하려고.”

“아무것도 안 해.”

태헌이 팔을 벌렸다.

해원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몸을 조금 움직였다.

태헌의 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제대로 안았다.

키스보다 이상했다.

가슴이 더 뛰었다.

태헌은 세게 끌어안지 않았다.

그저 해원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만,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만큼은 충분히 안았다.

해원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심장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살아 있는 사람의 소리.

그 소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태헌아.”

“응.”

“아프지 마.”

태헌이 해원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노력할게.”

“사고도 나지 말고.”

“그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나.”

해원이 그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럼 운전 조심해.”

“응.”

“진짜.”

“응.”

잠시 후 태헌이 말했다.

“해원아.”

“왜.”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품에서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원이 먼저 몸을 떼었다.

“이제 가.”

“응.”

“약 잘 챙겨 먹고.”

“응.”

“내일 병원 다시 가야 하면 연락하고.”

“응.”

“아프면.”

태헌이 먼저 말했다.

“말할게.”

“힘들면?”

“말하고.”

“외로우면?”

태헌이 웃었다.

“윤해원 부를게.”

해원도 웃었다.

“맨날 부르지 마.”

“왜?”

“나도 바빠.”

“그래도 올 거잖아.”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헌이 차 문을 열었다.

내리기 직전 다시 해원을 바라봤다.

“해원아.”

“응.”

“사랑해.”

해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처음이었다.

태헌이 좋아한다고는 여러 번 말했다.

보고 싶다고도 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태헌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장난으로 덮지 않았다.

대답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했다.

“대답 안 해도 돼.”

그리고 차에서 내렸다.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해원은 태헌의 말을 계속 생각했다.

사랑해.

젊었을 때는 참 쉽게 들었던 말이었다.

때로는 쉽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기다림.

바카라임.

걱정.

서운함.

상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한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

그래서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했다.

해원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도착하면 꼭 연락해.’

해원은 짧게 답했다.

‘도착했어.’

바로 답이 왔다.

‘잘 자.’

해원은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썼다.

‘태헌아.’

‘응.’

손가락이 멈췄다.

사랑해.

썼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오늘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보냈다.

잠시 뒤 태헌에게서 답이 왔다.

‘그 말이면 충분해.’

해원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사랑은 같은 속도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먼저 도착하고,

누군가는 조금 늦게 따라간다.

중요한 것은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재촉하지 않는 것.

그리고 늦게 가는 사람이 도망치지 않는 것.

강태헌은 먼저 사랑이라는 곳에 서 있었다.

윤해원은 아직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했다.

그녀는 이제 도망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가고 있었다.

몇 년 전 제주에서 강태헌이 비를 맞는 윤해원에게 달려왔던 것처럼.

이번에는 해원이 달려갔다.

어쩌면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가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가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해원은 아직 몰랐다.

이 작은 사고가 두 사람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기게 될 줄은.

좋아하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일까.

남은 다섯 번의 이야기는,

그 질문에 대한 윤해원과 강태헌의 대답이 될 것이다.

25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