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은 금방 왔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4화
네가 선택한 거면 해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해원은 모델 회사에서 보내온 계약 조건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촬영 시간.
교통비.
광고 사용 기간.
추가 촬영 가능성.
그리고 페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적지도 않았다.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해원은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태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오늘 모델 회사 가서 면담해.
답장은 금방 왔다.
페이는 괜찮아?
해원은 피식 웃었다.
이 남자는 왜 항상 낭만적인 순간에 돈부터 묻는지 모르겠다.
아직 몰라.
아마 엄청 많지는 않을 듯.
잠시 후.
그럼 왜 해.
해원의 눈썹이 올라갔다.
경험이지.
조금 뒤 답이 왔다.
경험도 돈 받고 하는 거야.
“재수 없는 놈.”
해원은 혼잣말을 하면서도 웃었다.
내가 아는 회사들이랑 비교해보고 결정하려고.
오늘 면담해봐야 알지.
한참 답이 없었다.
그리고 딱 한 줄.
그래. 알아서.
해원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참 성의 없는 인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페이가 어떻고 경험도 돈 받고 해야 한다고 떠들던 사람이 갑자기 알아서 하란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태헌은 늘 그랬다.
자기 생각은 귀가 아플 정도로 말했다.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바카라도 읽으라고 하고,
세상을 한 방향으로 보지 말라고 하고,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가 막상 해원이 무언가를 결정하려 하면 마지막에는 늘 한발 물러났다.
네가 결정해.
네 인생이잖아.
처음에는 무바카라임한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다.
태헌은 해원의 선택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해원이 선택하기 전에
한 번쯤 다른 방향을 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면담은 생각보다 길었다.
담당자는 해원의 프로필을 보며 말했다.
“연령대가 오히려 장점이세요.”
해원이 웃었다.
“그런 말 처음 듣네요.”
“요즘은 자연스럽게 나이 든 얼굴을 원하는 광고도 많아요.”
자연스럽게 나이 든 얼굴.
예전 같았으면 그 말이 싫었을 것이다.
늙었다는 말을 포장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자연스럽게 나이 든 얼굴.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의 얼굴이니까.
담당자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광고 위주로 먼저 해보시죠.”
“드라마나 다른 촬영도 있나요?”
“기회가 있으면요. 그런데 처음부터 너무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아요.”
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괜히 희망만 부풀리는 사람보다 낫다.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회사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눈부셨다.
해원은 바로 계약하지 않았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기회가 왔으니 무조건 잡았을 것이다.
놓치면 다시 안 올 것 같아서.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
한 번 더 생각했다.
정말 내가 원하는가.
돈 때문인가.
인정받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그냥 해보고 싶은가.
해원은 길가 벤치에 앉았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해보고 싶었다.
그거면 됐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할 것 같아.
태헌에게 보냈다.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
왜?
해원이 웃었다.
좋아서.
돈은?
크게 안 중요해.
잠시 후.
너 돈 좋아하잖아.
미친놈.
사실이잖아.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런데 이건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닌 듯.
한참 답이 없었다.
그러다 태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그럼 해.
딱 세 글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힘이 났다.
그날 저녁.
태헌에게서 긴 글 하나가 왔다.
사람은 무엇을 볼 때
한 방향만 보면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한쪽에만 서면 결국 다른 것을 못 보게 된다는 이야기.
해원은 한참 읽었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너는 이런 걸 왜 맨날 나한테 보내?
답이 왔다.
너 고지식해서.
뭐?
조선시대 사람.
차단한다.
ㅋㅋㅋ
해원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러다 잠시 뒤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근데 맞는 말 같아.
뭐가.
사람 한 방향으로 보면 안 된다는 거.
이번에는 태헌의 답장이 조금 늦었다.
많이 컸네.
죽을래?
칭찬인데.
네 칭찬은 항상 기분 나빠.
그러니까 오래 기억하지.
해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오래 기억하지.
무엇을?
자기 말을?
아니면 자신을?
해원은 괜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 촬영할 때 웃기게 나오면 어떡하지.
태헌이 바로 답했다.
원래 웃기잖아.
야.
사진 나오면 보내.
왜?
봐주게.
심사위원이냐?
아니.
그럼?
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
남사친.
해원은 그 두 글자를 오래 봤다.
남사친.
그래.
그게 맞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편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메시지가 왔다.
근데 혹시 촬영 너무 야하면 하지 마.
해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뭔 소리야.
광고라며.
그렇지.
옷 이상한 거 입히면 하지 말라고.
왜?
답이 없었다.
해원은 장난기가 생겼다.
혹시 누드 촬영이면?
몇 초 뒤.
미쳤냐.
해원이 소리 내 웃었다.
왜.
사진 보내줄까?
이번에는 읽음 표시만 뜨고 한참 답이 없었다.
해원은 더 웃었다.
드디어 강태헌을 말문 막히게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사진은 됐고.
그 다음 메시지가 왔다.
나만 봐.
해원의 웃음이 멈췄다.
화면을 다시 읽었다.
나만 봐.
가슴 어딘가가 아주 작게 움직였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 순간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네 모델 사진 나오면
나한테만 먼저 보여달라는 뜻.
해원이 피식 웃었다.
역시.
괜히 순간 놀랐잖아.
누가 놀랐대?
아무것도 아니야.
해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얼굴이 조금 뜨거웠다.
친구끼리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래된 친구라면 더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날 밤 거울을 보다가
태헌의 말이 다시 생각났을까.
나만 봐.
해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미쳤어, 윤해원.”
그리고 화장대 불을 껐다.
같은 시각.
태헌은 자기 서재에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방금 해원과 나눈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만 봐.
그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자신이 왜 그런 말을 썼는지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급하게 말을 덧붙였는지도.
태헌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바카라상 위에는 검은 수첩이 있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 수첩을 펼쳤다.
윤해원.
그 이름 아래에는 여전히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절대 시험하지 말 것.
태헌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내가 먼저 흔들리면 안 된다.
잠시 후,
그 문장을 바라보던 태헌이
혼자 웃었다.
“이미 늦었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해원에게서 온 메시지는 아니었다.
낯선 번호였다.
태헌이 전화를 받았다.
“네.”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가 말했다.
“대표님, 말씀하신 윤해원 씨 쪽 확인됐습니다.”
태헌의 표정이 굳었다.
“뭐가요?”
“남편 쪽 상황 말입니다.”
태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게 물었다.
“어떻답니까?”
남자의 대답을 들은 순간,
태헌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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