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다

“역시 너답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3화
네가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다

합격 연락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해원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광고 촬영까지 같이 진행하실 수도 있습니다.”

담당자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았다.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카메라 앞에 다시 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울을 바라봤다.

눈가에는 세월이 있었고
입가에는 웃을 때마다 생기는 선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것부터 보였을 것이다.

늙었다.

늦었다.

이제 와서 무슨.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다른 게 먼저 보였다.

아직 괜찮네.

해원은 혼자 웃었다.

그리고 거의 본능처럼 휴대전화를 들었다.

강태헌.

이름을 누르려다가 멈췄다.

왜 이 사람한테 제일 먼저 말하려고 하지?

해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삼십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들었다.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

나 붙었어.

답장은 1분도 안 돼 왔다.

뭘?

해원의 얼굴이 구겨졌다.

카메라 테스트!

아.

아가 뭐야.

붙을 줄 알았어.

이번에는 해원이 조금 웃었다.

말은 참 밉게 하는데
이상하게 그 한마디가 좋았다.

붙을 줄 알았어.

잘했다고도 아니고
축하한다고도 아니고.

마치 처음부터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해원이 답했다.

축하한다는 말은 못 하냐?

곧 답이 왔다.

밥 사.

내가 왜?

합격했잖아.

합격하면 내가 사야 돼?

응.

역시 이상한 인간이었다.

해원이 휴대전화를 던져놓으려는데 다시 메시지가 왔다.

내일 저녁 시간 돼?

손이 멈췄다.

태헌이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디?

청담.

비싼 데?

내가 낸다.

그럼 감.

역시 돈 좋아하네.

미친놈.

마지막에 웃는 이모티콘 하나가 왔다.

해원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

태헌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한 명 더 와도 돼?

해원은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누구?

여자.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어제까지 좋았던 기분이 이상하게 식었다.

아.

결혼할 여자 후보?

그런 셈.

해원은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가 답했다.

그래.

그리고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

별일도 아닌데 기분이 나빴다.

자기가 소개해주겠다고 했던 여자도 있었고
태헌이 누구를 만나든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자신까지 부르는지 모르겠다.

둘이 밥 먹으면 되지.

내가 왜 끼어.

해원은 몇 번이나 약속을 취소할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우스워졌다.

윤해원.

정신 차려.

네 남자도 아니잖아.

결국 약속 장소에 나갔다.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입구에서 직원이 태헌의 이름을 듣자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대표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해원이 태헌을 흘겨봤다.

“작은 회사라며?”

“작아.”

“여기 직원이 왜 널 알아?”

“자주 와.”

“맨날 이런 데서 밥 먹냐?”

“가끔.”

“재수 없어.”

태헌이 웃었다.

“들어가, 조선 여자.”

“한 번만 더 그러면 집에 간다.”

두 사람은 티격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이미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해원보다 열다섯 살은 어려 보였다.

긴 머리.

잘 관리된 피부.

단정하면서도 값이 꽤 나가 보이는 옷.

여자는 해원을 보더니 순간적으로 표정이 흔들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태헌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윤해원.”

그리고 여자 쪽을 바라봤다.

“민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해원은 눈치챘다.

태헌이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여자가 먼저 물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세요?”

해원이 대답하려는데 태헌이 먼저 말했다.

“오래 봤어요.”

“친구예요.”

해원이 바로 정정했다.

태헌이 해원을 보며 웃었다.

“친구래.”

“뭐가.”

“아니야.”

그 미소가 괜히 신경 쓰였다.

식사가 시작됐다.

민서는 대화를 잘했다.

유학 이야기도 했고
최근에 다녀온 유럽 여행 이야기도 했다.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다.

해원은 처음에는 생각했다.

괜찮은 여자네.

태헌하고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메인 요리가 나오면서 작은 일이 생겼다.

민서가 직원에게 말했다.

“제가 미디엄레어라고 했는데 이건 거의 미디엄이잖아요.”

직원이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다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이런 데서 이런 실수를 해요?”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직원이 연신 사과했다.

해원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태헌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해원을 보고 있었다.

민서가 아니라.

해원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나를 봐?

태헌은 아무렇지 않게 와인을 마셨다.

직원이 다시 음식을 가져왔다.

이번에는 민서가 포크를 들다가 해원에게 물었다.

“해원 씨는 무슨 일 하세요?”

“이것저것 해요.”

“이것저것?”

“일할 수 있는 건 해요.”

“대표님 회사랑 관련 있으세요?”

“아뇨.”

“그럼 두 분은 어떻게 아셨어요?”

해원이 웃었다.

“그냥 오래됐어요.”

민서의 시선이 잠깐 해원의 옷과 가방을 훑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하지만 해원은 봤다.

그리고 그 순간,

또다시 태헌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해원이 먼저 인상을 썼다.

뭘 자꾸 봐.

입 모양으로 말했다.

태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민서가 화장실에 갔다.

해원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야.”

“왜.”

“뭐 하는 거야?”

“밥 먹잖아.”

“왜 나 불렀냐고.”

“같이 먹자고.”

“둘이 먹어.”

“싫어?”

“내가 왜 네 맞선에 끼어야 하는데?”

태헌이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어때?”

“뭐가.”

“민서.”

해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심사위원이냐?”

“그냥 네 생각.”

“예쁘고, 말 잘하고, 능력도 있어 보이고.”

“그게 다야?”

해원은 잠시 생각했다.

“근데.”

태헌이 눈을 들었다.

“직원한테 말하는 건 좀 별로.”

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원이 덧붙였다.

“그래도 한 번 가지고 사람 판단하면 안 되지. 오늘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고.”

태헌이 피식 웃었다.

“역시 너답다.”

“뭐가.”

“까다로운 것 같으면서 꼭 마지막에 변명 하나씩 만들어주잖아.”

“사람 한 번 보고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그때 민서가 돌아왔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식사 후 민서는 먼저 차를 타고 떠났다.

태헌과 해원만 호텔 앞에 남았다.

가을밤 공기가 조금 차가웠다.

해원이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뭐.”

“마음에 들어?”

태헌은 대답 대신 해원의 얼굴을 봤다.

“왜.”

“뭐가?”

“오늘 계속 나만 쳐다보잖아.”

그가 웃었다.

“봤어?”

“눈이 있는데 모르겠냐.”

태헌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민서는?”

“뭐가.”

“예쁘잖아.”

“예쁘지.”

“어리고.”

“응.”

“능력도 있고.”

“그러니까 잘해봐.”

해원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척.

태헌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물었다.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해?”

“뭘?”

“내가 저 여자랑 잘됐으면 좋겠냐고.”

해원은 웃었다.

“그럼 안 돼?”

“왜 질문에 질문으로 답해.”

“네가 결혼하고 싶다며.”

태헌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 내가 왜 너를 부른 줄 알아?”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민서 평가해 달라고?”

태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그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해원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조금 멈췄다.

태헌은 평소와 다르게 웃지 않았다.

“나는 오늘 그 여자를 보러 나온 게 아니야.”

해원의 눈이 흔들렸다.

“그럼?”

태헌이 말했다.

“네가 그 여자를 어떻게 보는지가 궁금했어.”

“왜?”

대답이 없었다.

태헌은 해원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가 다시 평소 얼굴로 돌아왔다.

“가자. 춥다.”

“야.”

“왜.”

“말하다 말고 어디 가.”

“택시 잡아줄게.”

“강태헌.”

그가 돌아봤다.

“왜 내가 어떻게 보는지가 궁금했는데?”

태헌의 표정에서 잠깐 무언가가 지나갔다.

하지만 곧 웃었다.

“윤해원.”

“왜.”

“너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아.”

“또 잘난 척하네.”

“그러니까 내가 옆에서 알려줘야지.”

“됐거든.”

해원이 먼저 걸었다.

그는 그런 해원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그날 밤.

민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엔 둘이 봐요.

태헌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다음 약속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대화창을 닫았다.

몇 초 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였다.

“저번에 말한 거.”

“네, 대표님.”

“상속 관련해서요.”

“말씀하십시오.”

태헌은 창밖을 보았다.

“조건 하나 바꿀게요.”

“어떤 조건을요?”

잠시 침묵.

“결혼이라는 형식은 없어도 됩니다.”

변호사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헌의 시선이 휴대전화 화면으로 향했다.

윤해원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가 떠 있었다.

집 도착.
오늘 밥은 잘 먹었다.
근데 다음부터 네 맞선에 나 부르지 마.

태헌이 천천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사람이 나를 선택하기만 하면 돼요.”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혹시 이미 정하신 겁니까?”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낮게 혼잣말처럼 말했다.

“문제는…”

그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 여자는 아직 내가 얼마나 가진 사람인지 모른다는 거지.”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2화여자 좀 소개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