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을 내고 꿈꾸지 않는다

물론 기회가 있죠.”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5화
나는 돈을 내고 꿈꾸지 않는다

“2년 과정입니다.”

해원은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2년이요?”

“네. 워킹부터 표정, 자세, 무대 동선까지 체계적으로 배우셔야 해요.”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가 갑자기 낯설어 보였다.

해원은 다시 물었다.

“그럼 광고 촬영이나 드라마 단역은요?”

상담실장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기회가 있죠.”

“기회가 있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교육받으시면서 프로필을 만들고, 저희 쪽 캐스팅에도 추천을…”

말끝이 조금 흐려졌다.

해원은 계약서 첫 장을 넘겼다.

수강 기간 24개월.

그리고 그 아래 적힌 금액.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걸 한꺼번에 내는 거예요?”

“일시납으로 하시면 혜택이 있고요.”

해원은 등을 의자에 기댔다.

카메라 테스트.

광고 촬영.

드라마 단역.

한복 모델.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때는 자신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 줄 알았다.

늦은 나이에도 카메라 앞에 설 수 있겠구나.

어쩌면 작은 역할 하나쯤은 시작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지금 자신 앞에 놓인 것은 배역표가 아니라 수강계약서였다.

해원이 물었다.

“제가 광고나 단역 오디션을 본 게 아니라 학원 테스트를 받은 건가요?”

상담실장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학원이라고만 보시면 안 돼요. 저희가 실제 패션쇼도 하고…”

“그럼 지금 당장 촬영이 정해진 건 없고요?”

“앞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해원은 더 듣지 않았다.

계약서를 조용히 덮었다.

“생각해볼게요.”

“오늘 결정하시면 할인되는 부분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좋은 기회인데요.”

해원이 웃었다.

“좋은 기회면 내일도 좋은 기회겠죠.”

상담실장이 잠시 말을 잃었다.

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과 몇 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혹시 이 기회를 놓치면 어쩌지.

다시는 연락이 안 오면 어쩌지.

다른 사람들은 다 시작하는데 나만 뒤처지면 어쩌지.

그런 생각에 계약서에 이름부터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해원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기 직전,

상담실장이 뒤에서 말했다.

“윤해원 님, 나이가 있으셔서 지금 시작하셔야 해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해원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나이가 있으셔서.

그 말이 이상하게 우스웠다.

쉰을 훌쩍 넘은 여자를 붙잡는 가장 쉬운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아니면 늦어요.

해원은 혼잣말했다.

“늦으면 좀 어때.”

그리고 웃었다.

“내 인생인데.”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태헌이었다.

해원은 전화를 받았다.

“어.”

“계약했어?”

첫마디가 그거였다.

“안 했어.”

“왜?”

“학원이더라.”

태헌이 잠시 조용했다.

“무슨 학원?”

“한복 패션쇼 연습을 2년 한대.”

“그래서?”

“2년치 돈 내래.”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웃음이 들렸다.

해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웃어?”

“아니.”

“웃었잖아.”

“네가 안 했다는 게 웃겨서.”

“왜.”

태헌이 말했다.

“많이 컸네.”

“죽고 싶어?”

“예전 너 같았으면 했을 것 같아서.”

해원은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조금 고민하긴 했어.”

“얼마나?”

“한 3분?”

“많이 컸다니까.”

“끊는다.”

“잠깐.”

태헌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하고 싶은 건 맞아?”

해원은 걸음을 멈췄다.

“뭐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거.”

“응.”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태헌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해.”

“학원은 안 한다니까.”

“학원 말고.”

“어떻게.”

“방법이 그것 하나뿐이야?”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헌이 계속했다.

“너는 꼭 문 하나 닫히면 건물 전체가 문 닫은 줄 알더라.”

해원이 피식 웃었다.

또 시작이다.

“그럼 어떻게 해?”

“광고면 광고를 찾아. 단역이면 단역을 찾고.”

“내 나이에?”

“또 나이.”

“사실이잖아.”

“윤해원.”

태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인데 왜 자꾸 네가 먼저 탈락시켜?”

해원의 발걸음이 멈췄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젊은 여자 둘이 웃으며 앞을 지나갔다.

유모차를 미는 여자도 있었고,
정장을 입고 빠르게 걷는 남자도 있었다.

각자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태헌이 말했다.

“뽑는 사람들이 싫다고 하면 그때 그만둬.”

“…….”

“근데 왜 네가 먼저 ‘난 나이가 많아서 안 돼’ 하고 탈락시키냐고.”

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끔 이 남자가 싫었다.

정확한 곳을 찔러서.

“알았어.”

“뭘.”

“알아본다고.”

“그래.”

그리고 태헌은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알아서 해.”

해원이 웃었다.

“야.”

“왜.”

“너는 그렇게 잔소리 다 하고 마지막에는 꼭 알아서 하래.”

“네 인생인데 내가 결정해?”

그 말이 또 마음에 남았다.

네 인생인데.

해원은 작게 대답했다.

“그래.”

“밥은 먹었어?”

“아직.”

“밥 먹어.”

“아까는 내 인생이라며.”

“굶는 건 보기 싫어.”

해원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어른아.”

태헌이 잠시 조용해졌다.

“뭐?”

“아무것도 아니야.”

해원은 전화를 끊었다.

이상했다.

한 살 어린 남자를 두고
왜 자꾸 어른이라는 말이 떠오르는지.

그날 오후,

태헌은 사무실에서 한 통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전날 밤 자신이 부탁했던 일이었다.

“윤해원 씨는 법적으로 혼인관계 유지 중입니다.”

태헌의 손이 멈췄다.

“그건 압니다.”

“그리고 그 이상은…”

상대가 말을 망설였다.

“말하세요.”

“가정 내부 문제는 확인하려면 조금 더 들어가야 합니다.”

태헌은 눈을 감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됐습니다.”

“대표님?”

“그만 알아보세요.”

“하지만 어제는…”

태헌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직접 물어볼 일이지 뒤에서 알아볼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힘들었는지.

왜 자신에게 가끔 기대는 것처럼 보이는지.

왜 이혼했느냐는 질문에 늘 대답을 피하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알고 싶은 것과
알아도 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태헌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해원 때문이었다.

이상한 여자.

사람에게는 원칙을 지키라고 하면서
정작 자기는 죽어라 일하고,

돈이 없다고 걱정하면서도
돈이 걸린 선택에서는 이상하게 고집을 부렸다.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하면서도
자기 마음에 아닌 것은 결국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강태헌이라는 이름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가 가진 회사가 얼마나 큰지.

부동산이 얼마나 되는지.

해외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말 많은 남사친.

자기보다 한 살 어린데
가끔 재수 없을 만큼 아는 척하는 남자.

해원에게 태헌은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좋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래서 더 무서웠다.

저녁 일곱 시.

해원은 식탁에 앉아 인터넷으로 광고 모델 모집 공고를 보고 있었다.

50대 여성.

중년 여성.

엄마 역할.

한복 촬영.

드라마 이미지 단역.

생각보다 많았다.

“있잖아.”

혼잣말이 나왔다.

왜 그동안 없다고 생각했을까.

해원은 프로필 사진을 하나씩 골랐다.

정면 사진.

웃는 사진.

전신 사진.

그러다 카메라 테스트 때 찍었던 사진 앞에서 손을 멈췄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해원은 태헌에게 사진을 보냈다.

이거 프로필로 쓸까?

읽음.

답이 없었다.

1분.

3분.

5분.

“뭐야.”

평소 같으면 벌써 뭐라도 놀렸을 인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메시지가 왔다.

다른 사진 없어?

해원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별로야?

한참 뒤.

아니.

그럼?

답장이 다시 늦었다.

너무 괜찮게 나왔어.

해원은 화면을 보며 웃었다.

“이 인간 오늘 왜 이래.”

답장을 쓰려던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해원은 잠시 망설이다 받았다.

“여보세요?”

“윤해원 배우님 맞으세요?”

배우님.

그 단어 하나에 해원의 허리가 저절로 펴졌다.

“네. 그런데요?”

“프로필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저희가 다음 주 광고 촬영을 하는데요. 50대 여성 역할을 찾고 있습니다.”

해원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어떤 광고인가요?”

남자가 설명을 이어갔다.

촬영은 하루.

교육비 없음.

등록비 없음.

그리고 페이까지.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물었다.

“제가 돈 내는 건 없는 거죠?”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가 웃었다.

“배우님이 왜 돈을 내세요.”

그 말에 해원도 웃었다.

“죄송해요. 오늘 좀 이상한 데를 다녀와서요.”

“그런 곳 많죠.”

남자는 잠시 웃다가 말했다.

“사진보다 실제 분위기가 더 궁금하네요.”

“네?”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미팅 한번 하시죠.”

해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그때 휴대전화 화면 위로
태헌의 메시지가 하나 더 떠올랐다.

누구랑 통화해?

해원은 통화를 계속하며
그 메시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장난기가 생겼다.

남자.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몇 초 뒤.

강태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해원은 화면을 보며 웃었다.

받지 않았다.

그러자 메시지가 왔다.

무슨 남자?

해원은 더 웃었다.

처음이었다.

늘 여유롭던 강태헌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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