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움직인 것은 마음이었다.

by고혜정

가끔은 이성적인 생각보다 마음이 훨씬 먼저 움직인다. 어떤 사람은 충분히 계산한 뒤에야 첫걸음을 내딛지만, 나는 오래 망설이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의 추가 한쪽으로 툭 기울면 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편이다.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돌아온 지 겨우 석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분간은 집에 머물며 일상을 차분히 정돈해야지, 머무는 여행은 한동안 쉬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구마모토에서 한 달간 머물며 일상을 관찰할 수 있는 ‘쿠마몬 후루사토 프로그램’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머릿속 계산기로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답이 나와야 맞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구마모토의 낯선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이성적인 계산 끝에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마음이 먼저 뜨겁게 반응했고, 주춤거리던 생각은 그 뒤를 허둥지둥 따라왔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중요한 장면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보다.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움직였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선택들은 예상보다 훨씬 넓은 삶의 풍경으로 나를 데려가주었다.


물론 마음을 따라 덜컥 걸음을 내딛고 나면, 곧이어 현실적인 불안이 따라붙는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괜히 유난을 떤 것은 아닐까’, ‘조금 더 신중하게 준비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새로운 시작 앞에서 피어나는 그런 질문들은 언제나 조바심을 불러왔다.


하지만 일단 시작의 선을 넘어서고 나면, 불안은 이내 ‘어떻게든 끝까지 잘 해내 보자’는 단단한 오기로 바뀌었다. 덜컥 시작한 일이 시간이 흐를수록 나라는 사람의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삶을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모험보다 안정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삶은 계산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 하나가, 꽉 막힌 일상에 새로운 계절을 열어주곤 했다.


image.png


철없는 충동과 삶의 직감을 같은 의미로 보지는 않지만, 오랜 세월 동안 숱한 경험을 거치며 내 안에 축적된 무의식의 감각 역시 또 하나의 판단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구마모토에서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기대했던 풍경과 다를 수도 있고, 생각지 못한 어색함이나 불편함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삶의 새로운 길은 오직 내가 내딛는 그 첫걸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모든 계산이 끝난 뒤 움직이는 삶도 있지만, 먼저 움직였기에 생각과 의미가 따라오는 삶도 있다.


오늘도 나는 그 설레는 길 위에 서 있다. 결국 내 삶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계산이 아니라, 먼저 움직인 마음이었다.


이전 04화흐르는 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