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의 어학연수를 마친 뒤, 나는 곧바로 다음 여정을 시작했다. 이번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손에는 21일간 자유롭게 철도를 이용할 수 있는 JR 레일패스가 쥐어져 있었다. 삿포로에서 시작해 후쿠오카까지, 일본 열도를 기차로 기다랗게 종단하겠다는 거창하고 정교한 계획을 품고 길을 나섰다.
온라인 게임에 매여 있던 시절에는 아무리 긴 휴가라 해도 일주일 남짓이 전부였다. 늘 다음 일정을 재촉하던 여행과 달리,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커다란 배낭 하나를 메고 덜컹거리는 기차 창밖으로 흘러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며, 이동 자체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삶이 그러하듯, 여행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그해 9월의 일본은 예상보다 훨씬 무겁고 뜨거웠다. 삿포로를 출발해 도쿄를 거쳐 가마쿠라와 시즈오카까지 무사히 내려왔지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기에는 더위가 예상보다 큰 장벽이었다.
시즈오카에서는 웅장한 후지산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 사흘이나 머물렀다. 근처 후지노미야까지 찾아가고 매일 일기예보를 몇 번씩 확인하며 기다렸지만, 후지산은 끝내 두터운 구름 뒤에 숨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는 후지산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 여행만큼은 처음 세운 계획을 끝까지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예전의 나라면 어떻게든 처음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숨 막히는 더위를 견디며 후쿠오카행 기차에 몸을 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해 보기로 했다.
‘계획을 바꾸자. 남쪽 대신 바람이 시원한 산속으로 가자.’
그렇게 발길을 돌려 도쿄를 거쳐 도야마와 나가노까지 갔다. 그리고 그 우연한 방향 전환은 21일간의 여행 전체를 전혀 다른 빛깔로 물들였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풍경,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던 가루이자와의 숲길, 구로베 협곡의 아찔한 절벽 사이를 천천히 달리던 작은 열차, 바다와 산이 한 장의 수묵화처럼 어우러지던 아마하라시 해안, 그리고 아담한 골목마다 조용한 시간을 품고 있던 가나자와까지. 당초 내 계획표에는 단 한 줄도 없던 장소들이, 그 여행에서 가장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풍경이 되었다.
나중에는 아예 나가노에 짐을 풀고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날이 유독 더운 날이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역으로 걸어가 가장 먼저 출발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한두 시간쯤 달리다 마음에 드는 작은 역이 나타나면 망설임 없이 내렸다. 이름 모를 골목을 천천히 거닐다 다시 돌아오는 일상.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목적을 내려놓자, 이동하는 행위 그 자체가 비로소 풍요로운 여행이 되었다.
이 뜻밖의 방랑을 가능하게 해 준 고마운 동행도 있었다. 손안의 작은 지도 앱이었다. 낯선 역의 환승 정보와 플랫폼 번호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현대의 기술 덕분에, 나는 목적지 없는 궤도 이탈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오래 머물 수 있었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라지자 그 빈자리는 순수한 호기심과 여유로 채워졌다.
돌아보면 이 여행의 처음 목적은 ‘일본 완벽 종단’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완주라는 포장지를 내려놓은 자리에, 나는 훨씬 더 귀한 삶의 지혜를 채워 가지고 돌아왔다.
계획이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처음에 세운 목표를 고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실패한 여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고집스러운 마음을 내려놓는 바로 그 순간, 여행은 비로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깊어지고 다채로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획을 수정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어쩌면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우리 삶을 훨씬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진짜 리듬일지도 모른다. 결국 오래 남는 것은 얼마나 멀리 갔는가가 아니라, 그곳에 어떤 마음으로 머물렀는가 하는 기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