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학생이 되던 날

by고혜정

몇 년 전에 나는 퇴직하자마자 필리핀으로 향했다. 주변에서는 이제 홀가분해졌으니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자유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온라인 게임을 떠나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매일 출근하던 자리와 익숙한 일상이 사라진 뒤 찾아올 상실감이 두려웠다.


돌아보면 어학연수는 영어를 배우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삶에 나를 몰입시키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혼자 떠나는 세 달의 타국 생활. 그것은 여행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밤늦게 세부 공항에 도착해 25kg 캐리어를 끌고 입국장을 나설 때까지도 긴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픽업 기사를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평소 해외여행에서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걱정을 그날은 몇 번이나 되뇌었다. 어학원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두 시. 짐을 겨우 풀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곧바로 다시 일어나야 했다. 아침 7시 40분까지 대강당으로 모이라는 안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들어선 대강당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일본, 중국, 대만, 몽골, 베트남, 아랍에미리트... 언어도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모두 달랐지만, 그날만큼은 모두가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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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호칭이 어쩐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시험을 보고, 시간표를 받아 들었다. 다음 날부터는 일대일 수업과 그룹 수업이 이어졌다. 첫 그룹 수업에서 먼저 말을 걸어준 일본인 사키는 시간이 흘러 지금까지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어학연수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영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세 달이면 영어가 꽤 늘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가장 큰 착각이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위해 외웠던 단어들은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영어는 아는 것과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른 일이었다. 쉬는 날이면 도서관으로 향했고,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세 달이라는 시간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기에는 짧았다. 조금 더 준비하고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영어를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틀릴까 봐 입을 다물던 사람에서 틀려도 먼저 말을 건네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

어학연수는 영어 실력보다 용기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알게 했다. 새로운 삶은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도 한 걸음을 내딛는 사람에게 시작된다는 것을.


필리핀에서의 세 달은 퇴직 후 가장 먼저 선택한 시간이었고, 그 시간은 이후의 모든 여행으로 이어졌다. 세 주를 머물고, 한 달을 살아보고, 다시 다른 도시에서 또 다른 계절을 만났다.


돌아보면 내가 배운 것은 영어만이 아니었다. 낯선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 새로운 사람들과 연결되는 기쁨, 그리고 삶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 모든 것은 필리핀에서 다시 학생이 되었던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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