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에 대한 묵상 - 평상심(平常心), 무심(無心)

by전영칠

'근원에 대한 관상(묵상)'시리즈는 관상하고 살면서 문득 스치는 느낌(생각)들을 쓴 것입니다.

(* 관상(觀想)은 '사랑의 고요한 인식' 혹은 '신적 현존에 온전히 잠겨 쉬는 응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관상(觀想)은 인간이 머리로 생각(想)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맑게 비워 신적 실재가 영혼의 눈(觀)에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내맡기는 직관적 머무름을 뜻합니다.)





65. 평상심(平常心), 무심(無心)




묵상, 명상할 때, 집중할 때 그때는 고요하다.

그러나 평상시, 스트레스받을 때 다양한 갈등과 함께

반항, 대립, 항거, 보복 같은 생각들이 나올 때

고요함으로의 이행이 어렵다.

대부분은 참지 않는다.


최근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내차를 운전하기 위해 2열 주차된 앞의 차를 손으로 밀었으나

다시 뒤로 밀려 손으로 막았으나 차가 무거워 손 발 모두를 사용해 가볍게 멈추었는데,

차 쪽에서 오다가 이것을 본 20대 후반의 여성이 내 차를 발로 찼다고 화가 나서 말했다.

나는 차가 뒤로 밀려 차를 멈추게 하기 위한 동작이었을 뿐

차를 차서 차를 망가뜨리는 행위가 아니었다는 항변을 하였으나 그 젊은 여성은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전화를 걸어 남편을 불렀다. 잠시 후 30대 초반의 남편이 다가 왔다.

나는 다시 한번 정황을 이야기 하였으나 부부는 막무가내였고 자기의 차를 발로 찼다고 손해배상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중히 사과하지 않으면 차 손괴 행동에 대해 소송하겠다고 했다.

차는 가벼운 생채기 하나 없는 그대로의 상태였다.

물론 남의 차에 발을 댄 것은 내 잘 못이라 할만하다. 자칫 오해 살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겁게 뒤로 밀려도 손만으로 잡을 껄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이유로 남의 차를 발로 차겠는가? 이 게 소송을 할 일인가.


한번 해봐?

갈 때까지 가봐?

젊은 사람들이...

일 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나는 마음속으로 평상시 명상 기법 중 하나인 흙탕물 섞은 유리잔을 생각했다.

탁한 흙탕물은 잠시 후면 맑아진다.

나는 항변을 포기했다. 그리고 고개 숙여 정중히 사과했다.

내가 항변을 포기하고 사과한 이유는 이 일이 내 삶에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숨 걸 일이 아니지 않은가?

목숨 걸 일은 따로 있다. 구원, 해탈, 근원과의 만남 ㅡ 그것들은 목숨을 걸만한 주제다.


사과를 하고 돌아서는 내 등 뒤로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을 생각했다.

무엇이 그 젊은 영혼들을 그토록 날카롭게 만들었는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차라는 물건이 아니라, 아마도 상처받기 쉬운 그들의 '자아'였을 것이다.

작은 흠집조차 허용하지 못하는 그 결벽함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내면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반 위에 서 있는지를 반증한다.

자신의 존재 증명을 오로지 물질적 소유와 법적 승리에서 찾으려 할 때,

인간은 사소한 자극에도 비명을 지르는 가시 돋친 존재가 되고 만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채운 것은 억울함이 아니라 짙은 연민이었다.

눈앞의 이익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고소와 소송을 무기로 휘두르는 이들은,

사실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메말라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근원과 연결되지 못한 채 표류하는 자아는 늘 불안하다.

그 불안이 공격성으로 변하고, 결국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타인에게 칼끝을 겨누는 것이다.

그들이 쫓는 승리는 찰나의 만족일 뿐, 결코 내면의 평화에 가닿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내가 고개를 숙인 것은 당연히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들의 텅 빈 내면이 내는 요란한 소리에

대해 먼저 길을 걷는 선배로서의 조용한 위로이고 싶었다.


'각자의 에고'로 생존을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 거대한 전장(戰場)'으로서의 현대 슬롯라면

이는 시간낭비다. 아니 슬픔이다.

진정한 인생의 주제를 상실한 깊은 슬픔이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2024년, 2025년의 소송이 몇 건인지를 살펴보자.


한국 사법부의 통계 자료와 사법연감의 흐름을 분석해 보면, 한국 슬롯가 '소송의 나라'로 불리는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2024년 - 전체 접수된 사건(민사, 형사, 가사 등 포함)은 약 640만 건에서 650만 건 사이로 추산된다. 특히 민사 본안 사건의 비중이 높으며, 인구 대비 소송 비율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


2025년 - 소송 만능주의의 심화와 권리 의식의 과잉, 그리고 사소한 분쟁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이어지며 전체 사건 수는 약 660만 건을 상회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는 이웃 나라인 일본과 비교했을 때도 수십 배에 달하는 수치다.

사소한 갈등이 대화와 화해보다는 법적 투쟁으로 번지는 슬롯적 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은 소송의 나라가 되었다.



사상체계 없이 에고와 욕망을 뿌리로 해서 튀어나오는 수 없이 많은 생각들 ㅡ

그것은 <나>가 아니다.


문제는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이런 다양한 스트레스와 사건들에서

내가 얼마나 나의 인생 주제에 맞게 무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무심(無心)의 뜻은 무엇인가?

무심은 단순히 '마음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나 '멍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무심은 집착의 부재로, 대상에 대해 '좋다' '싫다'는 분별심을 내지 않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불안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이다.

거울은 앞에 있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 사물이 지나가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어떤 상(像)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무심이다.

무심은 '근원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에고(Ego)라는 인위적인 마음이 사라지고, 우주적 본성인 순수 의식만이 흐르는 상태이다.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나'라는 집착이 없는 것이다."


평삼심일 때 무심으로 살고 무심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 그러니 노력해야 한다.

자존심(Ego)의 투쟁에서 벗어나 근원(Source)의 평온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심이 무심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근원에서 나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근원에서 나오는 마음에서 인간이 상상하지 못하는

사소한 시비에서 자유로워지는 지혜의 힘이 나온다.

이것에 도움을 받으면 일상사의 사소한 갈등은 가볍게 내버릴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거니와 <나>라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무심(無心)의 문제이다.

(202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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