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에 대한 묵상'시리즈는 묵상하고 살면서 문득 스치는 느낌(생각)들을 쓴 것입니다.
1.
나는 첫 시집 <물방울들은 만나면 서로를 안습니다>를 1999년 4월 말에 발간했다.
그리고 5대 일간지인 조선, 중앙, 문화, 경향, 한국일보 문화부로 한부씩 보냈다.
그중 경향신문에서 4월 초파일에 <주인 없는 산사>라는 시를 게재하고 시집을 소개했다.
아래 시는 그 전문이다.
전 영 칠
길을 따라 걷다가
텅 비어 있는
절을 만났다
주인을 기다리다가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이곳은 혹시 꿈의 세계일지 모른다
대웅전에는 온갖 고통을 깔고 부처가 앉아 있다
백 년(百年)을 기다려도
오지 않을
주인(主人).
나는 이 시에서 내가 곧 주인이고, 부처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부처다. 오염된 것만 털어내면 된다.
절에 있는 부처 형상은 깨달아 부처가 된 석가모니를 기리는 뜻도 있으나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주기 위한 의미가 근본의 뜻일 것이다.
앞에 있는 부처상을 우러러 보기만 하면 그 순간 부처상은 우상이 된다.
2.
오랫동안 불교인으로 도를 닦은 선배를 만나 도담 중,
이런 대화가 있었다.
- 신은 없다. 신이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 80억 인류 중 신을 믿는 기독교인이 20억입니다. 그들을 어찌하시려고.
나는 서로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
선배는 완고했다. 대화가 중단되었다.
선배와의 도담은 오랫동안 정담이 되었지만 주머니에 숨어 있던 있던 송곳이 삐져나와
그 모양을 들어낸 형국이었다.
선배가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와 떨어진 타자로서 나를 심판하는 신을 말한다.
불교인들은 나를 심판하는 그런 타자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당연히 신은 내 안에 계신다.
금강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凡所有相 (범소유상) :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皆是虛妄 (개시허망) : 다 이것이 허망하다(실체가 없다).
若見諸相非相 (약견제상비상) :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면
卽見如來 (즉견여래) : 곧 여래(부처)를 보리라.
성경에 이란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불교에는 진여(眞如)와 여래(如來)가 있지만 기독교에는 신(神)이 있다.
진여와 여래,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이 '근원(根源)'이다.
불교인에게는 '신'이란 단어 대신 '진여'와 '여래'라는 단어를 쓰면 대화가 편해진다.
나는 선배와 대화를 중단하고 그 자리를 파했었다.
그리고 순간적인 판단을 후회했다.
그 선배와 대화를 끊을 이유가 없었다.
3.
신은, 여래는 내 밖에 있나 내 안에 있나?
신과 여래는 내 안에 있다.
내 밖에서 찾으면
백 년(百年)을 기다려도 만날 수 없다.
당나라 시대의 고승인 임제 의현(臨濟 義玄)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이는 부처는 외부에 있지 않으니, 내 안에서 부처(여래)를 만나라는 경계의 한 뜻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대화하는 신은 어떻게 된 것인가?
모세는 시내산 떨기나무에 계신 신과 대화했다.
기독교는 창조자와 피조인이 부자관계이기 때문이다.
모세와 떨기나무에 임하신 신과 인간은 부자관계다.
세상에서 부자관계가 차 한잔을 앞에 놓고 대화하는 형국인 것이다.
신은 내 밖에도 있고 내안에도 있다.
진여와 여래는 내 안에 있다.
다르다?
서로 존중하면 된다. 싸움은 한수 아래이다.
싸울 이유가 없다.
(2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