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상담

달리는 상담소

by청순일기

"사장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뒷자리에 앉은 승객의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였다.

"예, 말씀 해 보세요."


그는 한국에 온 지 10년이 되었다고 했다. 한국말이 아주 능숙했다. 여기서 한국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녀가 이혼하자고 한단다. 작년에도 헤어지자고 하여 뭣 때문에 그러냐고, 내가 고치겠다고 하니 이거저거 마음에 안든다고 아내가 말해 1년동안 아내가 말한 건 다 안했단다.

"그런데, 또 헤어지자고 해요. 뭐가 문제에요?"

외국인 승객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자들은 원래 남편에 대해 불만이 많아요.

남편이 돈을 못 벌면 돈 못번다고 타박이고, 돈을 잘 벌어오면 가정에 소홀하다고 불평이고, 돈 잘벌고 가정에 충실하면 밤일을 못한다고 불만이고, 돈 잘벌고 가정에 충실하고 밤일도 잘하면 친정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툴툴거려요.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서로 노력하면서 살 수 밖에 없어요. 부부 상담을 한 번 받아봐요. 그런데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도 있으니, 꼭 같이 사는게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택시 기사님은 해묵은 농담을 섞어 들려주며 나름 진지하게 답하였다.


"하하하하하, 여자들 그런거에요?"

승객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내렸단다. 남편이 집에 들어와 들려준 이야기였다.


택시를 카지노콜이나 지역콜로 부르는 요즈음은, 승객과 이야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카지노콜 같은 경우, 승객이 택시 기사의 평점을 매기기도 한다. 괜히 승객에게 말을 걸면, 택시기사가 말이 많다고 평점을 나쁘게 줄 수도 있고 평점이 안 좋으면 배차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가급적 말 없이 웃는 얼굴로 인사만 하는데, 가끔 승객이 하소연을 하거나 인생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있단다.




부부는 참 묘하고 어려운 관계이다.

생판 남이었던 사람들이 만나, 부모 자식보다도 가까워져 촌수가 없는 무촌(無寸)이 된다. 그러다 헤어지게 되면 다시 남이 되어버린다.


남편과 나는 재혼이다.

40대 중반에 이혼을 하였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전남편은 첫사랑이기도 했다. 눈에 콩까풀이 제대로 씌운 첫사랑이라 하더라도, 결혼의 무게를 다 감당하진 못했다. 그는 신혼 1년만 돈벌이를 하고, 그 이후는 계속 백수였다. 대학 졸업 후 바로 항공사에 입사한 나의 월급으로 생활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을 입에 달고 살았고 나도 오랫동안 그 말에 기대를 걸었다.


그가 큰 사고만 치지 않았다면, 나는 기대와 실망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만사에 open mind였던 그 사람에게는 돈도 마찬가지였다. 내 돈도 내 돈, 남의 돈도 내 돈의 경제 관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동네의 부동산업자들과 어울리다 사기에 연루되었다. 내 인감 도장을 몰래 가지고 가서, 부동산 투자 유치에 나를 보증인으로 만들었다. 나의 월급과 퇴직금이 보증이 된 것이다.


회사로 월급차압이 들어왔고, 우리 가족은 살던 집에서도 나와야 했다.


나는 절망했고, 그제야 모든 기대를 접었다. 우리 가족의 생활비인 나의 월급을 보증으로 걸었던 사람과 계속 산다면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으리라 깨달았고, 웃음 없이 살아가는 내 모습이 싫었다. 결국 이혼을 하였고 그와 나는 남이 되었다. 아이 둘에 대해 애들 아빠는 친권 포기를 하였다. 아들이 중학생,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 딸이 결혼을 하여 아기를 낳을 때까지, 그는 한번도 아이들을 찾지 않았다. 나와 헤어진 후에도 형편이 계속 좋지 않아서, 였을거라 생각한다. 아이들도 그런 아빠에 대해 원망도 그리움도 없이 쿨하게 생각하고 자라주었다.


40대 중반에 나는 새롭게 시작해야했다. 23살부터 20년을 회사에 다녔건만, 채권자들의 돈을 다 정리하고 나니 간신히 상가 3층에 전세집을 얻고, 통장 잔고 150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하지만, 든든한 회사가 튼튼한 동아줄이 되어주었다.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고, 아이들과 친정 엄마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기대할 사람이 없으니, 실망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내가 다 하면 되는 거였다. 오히려 나는 씩씩해졌다. 중학생이었던 딸이 언젠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탱크같아."

그 말이 기분 좋았다. 탱크처럼 강한 엄마인게 뿌듯했다.


아이들의 성장기에 '아빠의 부재'는 아픈 상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집에는 아빠의 역할을 하는 엄마와 엄마의 역할을 해주시던 외할머니가 계셔서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살았다. 아이 둘은 우리가 같이 살았던 집을 따뜻한 곳으로 생각한다.

만일 이혼하지 않고 살았다면, 계속되는 기대와 실망의 반복으로 지쳤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웃을 줄 모르는 엄마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독립한 뒤, 지금의 남편과 환갑에 재혼을 하였다. 30여년을 같은 회사에 다니던 친한 동료였다.

성실함의 아이콘인 남편이지만, 그도 이혼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었다.


각양각색,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니 이혼도 다 나름의 사유가 있다.

가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도 지켜야 한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나를 지키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한다.


수요일 연재
이전 07화요리하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