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의 인생 2막
2026년 2월 2일, 남편의 첫 개인 택시 운행일이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일하러 나가는 남편을 현관에서 배웅했다.
"돈 많이 벌어올께."
개인 택시 사장님은 설램이 묻은 얼굴로 손 흔들며 나갔다.
남편의 택시는 소나타이다. 그랜져와 소나타 중에서 나는 그랜져를 사기를 바랐건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나타를 선택했다. 그랜져로 운행한다고 요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차 값도 연료비도 더 드는 그랜져를 탈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그답게 효율적으로 판단했다. 대신 차 안의 매트는 고급형으로 바꾸었고 클래식 음악이 담긴 USB와 탈취 스프레이를 준비하였다.
개인 택시의 명함도 예쁘게 만들었고, 첫 날 택시를 타는 승객들에게 줄 기념품으로 타올을 준비하였다.
나가고 한 시간 쯤 지난 뒤,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 들 뜬 목소리로 '물 반, 고기 반'이라며 오늘은 늦게까지 일하다 가겠다고 하였다. 젊은 시절 프로 낚시꾼이었던 그 다운 표현이었다.
남편의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요즘 택시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우선 기본 요금이 4,800원이다. 자가용을 타거나 지하철, 버스를 이용하는 나는 택시를 타는 일이 좀처럼 없다. 기본 요금이 이렇게나 오른 것도 몰랐다. 그리고 승객들은 택시 기사를 기사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장님이라고 부른단다. 길거리에서 손을 들고 택시를 잡아타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카지노 콜이나, 지역 콜,우버등을 통해 택시를 부른다. 길가에서 손 들고 서서 택시 잡기는 거의 불가능이다. 예전에는 합승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과 방향이 같으면 함께 탔었는데, 지금은 합승은 불법이란다.
간혹 아들이 택시를 탔다는 말을 하면 ‘돈 아깝게 왜 택시를 타니?’라며 돈 낭비라도 한 듯 야단을 쳤다. 그런데 경기도 파주의 경우, 택시의 주 이용자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서민들이란다.
자가용이 없는 서민들이 급히 움직여야 할 때, 버스 노선도 없는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이 늦은 시간 귀가할 때, 혹은 이른 새벽 일하러 나가면서 택시를 탄다고 한다. 그리고 병원에 가는 어르신들이 많이 이용하시고, 외국인 근로자들의 탑승도 꽤 많다고 한다. 주말에는 삼사오오 같이 택시를 타고 친구집에 놀러가는 외국인 근로자가 많단다. 파주시에서도 외진 곳에 비닐 하우스 같이 열악한 곳에서 거주하는 근로자들이지만 늘 밝은 얼굴이고 타면 내릴 때까지 쉬지 않고 웃고 떠든단다. 병원 가는 어르신들은 남편이 내릴 때 부축해드리면 무척 고마워하시고, 가끔은 팁도 주신단다.
물론 늦은 밤에는 취객이 많이 탄다. 만취가 된 취객이 타면 혹시 오버잇이라도 할까봐 내릴 때까지 조마조마한데, 만에 하나 차내에 오버잇을 하면 승객에게 페널티 챠지가 부여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파주에는 천원 택시라는 게 있다. 파주시의 대중교통 소외지역인 마을 주민이 택시를 호출하여 터미널이나 역까지 가고는 단돈 천원만 내면 되는 정바카라이다. 승객은 천원만 내고 나머지 돈은 파주시에서 부담한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복지국가임을 새삼 느낀다.
남편에게 듣는 이야기는 새로웠다.
택시를 운행하며 그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힘들 수도 있는 일인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망설이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남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바카라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모르는 세상을 경험하는데, 그는 움직이면서 몸으로 배우고 경험한다. 물론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딪치며 세상을 배우는 편이 훨씬 깊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대로의, 나는 나대로의 인생 2막을 살아가고 있다.
퇴직을 하여 시간에 쫓기는 삶에서 벗어난 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마음껏 바카라을 읽는 것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바카라을 읽다가도 '내가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싶어 바카라을 덮는 경우가 많았다. 밀린 집안 일도 해야하고 UPDATE된 매뉴얼도 봐야하고 외국어 공부도 해야한다는 숙제를 안고 살았다. 지금은 원없이 바카라을 읽고, 좋은 구절은 필사하여 다시 뒤적이며 여유있게 독서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글쓰기를 한다. 나의 세계도 변하고 있다. 만나는 사람도, 관심사도, 바카라을 읽는 방법도, 글쓰기 위주로 바뀌어간다.
젊은 시절,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실린 이 글귀가 나를 사로잡았었다.
나는 여러분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을 하고 빈둥거리기도 하고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바카라을 보고 몽상에 잠기며 길모퉁이를 어슬렁거리고
상념의 낚싯줄울 강물에 깊게 드리울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들, 희망하였던 모습들이 언젠가 실체가 되어 나타나는 것을 살면서 경험한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들이기 때문에, 생각하고 소망하는 것들은 파장이 되어 모태인 우주에 전달이 되고,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기운을 모아준다고 생각한다.
충분한 돈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비교하지만 않는다면, 나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 돈이 있다. 시원한 바다와 너른 논과 푸른 숲은 전국 방방곡곡에 있다. 원하는 만큼 빈둥빈둥 여행을 할 수 있다.
아침에 남편이 나가고 나면, 나는 집을 치우고 바카라상에 앉아 바카라도 읽고 글도 쓴다. 점심 먹으러 남편이 올 시간이 되면 점심은 뭘 해서 먹을까, 레시피를 뒤적이다 슬렁슬렁 음식을 만든다.
쳇GPT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다가 너무도 똑똑하여 흠칫흠칫 놀라고 '장차의 세계에서 AI와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걱정도 하게 된다.
나를 사로잡았던 버지니아 울프의 글귀대로 나는 살고 있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늦은 시간에도 그 날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해 준다.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당신, 건성으로 듣는다?'라며 섭섭해한다.
초로(初老)의 부부가 사는 인생 2막의 나날이다.